5·18 광주공동체 정신은 통일의 그날로 승화돼야
5·18 광주공동체 정신은 통일의 그날로 승화돼야
  • 박병모 기자
  • 승인 2019.05.19 07:5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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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태 시인, 39년 전 ’아아 光州여, 우리나라의 십자가여‘詩 발표
광주민주화운동, 세계로 알리는 ’촉매제‘…해외 언론 앞 다퉈 보도
505 보안대 끌려가 고초·해직 아픔·베트남 참전·625전쟁 겪어
광주의 시대정신은 생명존중·희생·사랑·희망·평화·통일로 귀결

[시민의소리=박병모 기자] 80년 오월 그날의 전야제가 열리던 금남로에는 처연하게도 비가 주룩주룩 내렸다.

'아아 오월이여...'라는 詩로 5월광주 참상을 세게에 알린 김준태 시인
'아아 光州여, 우리나라의 십자가여'라는 詩로 5월 광주 참상을 세계에 알린 김준태 시인

39년 전 산화한 오월영령들이 전두환 신군부의 헬기 기관총 난사 등에 대한 진상규명이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음을 아는지 비가 내리고 있다.

아직도 미완의 역사로 남겨진 5.18 기념일을 이틀 앞두고 당시 처참했던 오월 광주 상황을 시로써 해외로 알린 김준태 시인을 만났다. 그의 시가 최근 일본의 시 전문잡지 ‘시와 사상’ 5월호에 ‘김준태 시집-광주로 가는 길’이 크게 실렸기에 한번 뵙자고 청했다.

일본 사회파 여류시인 사가와 아키(佐川亜紀)는 A4 용지 4페이지가 넘는 분량의 서평을 통해 광주민주화운동을 이렇게 언급한다. “역사의 피가 흐르고 살아 숨 쉬는 장소에 갔을 때 마음이 동요했었다”며 제1회 아시아문학제에 참석했던 광주에서의 기억을 떠올렸다.

사가와 아키는 “광주민주화운동이 일어났을 당시 계엄군이 보도통제를 하고 있었기에 김준태 시인이 쓴 ‘아아 光州여, 우리나라의 십자가여’라는 시는 세계에 광주의 항쟁을 전하는 커다란 역할을 수행했었다”고 출판 배경을 밝혔다.

특히 그가 언급한 서평 가운데 눈에 들어온 대목을 소개하자면 김준태의 비극적 체험이었다.

김 시인이 자신 스스로를 가리키며 ’한국 근현대사의 산증인이야‘라고 곧잘 말하는 것도 생사의 체험을 했기에 그렇다.

자신의 할아버지가 일본에 강제징용을 당했고, 아버지마저 태평양으로 징병에 끌려가 고초를 당한 뒤 탈출을 시도, 천신만고 끝에 귀국한다. 그의 가족사는 한국 근대사를 말해준다. 김 시인도 6.25 한국전쟁을 겪었고, 젊은 시절 청룡부대원으로서 베트남전쟁에 참전하게 된다.

대학을 마치고 광주 전남고등학교에 재직하는 동안 그는 5·18 광주민중항쟁의 참혹한 광경을 목격했다.

한국 현대사의 비극을 온몸으로 체험했던 김 시인이기에 일본의 중견 시인이자 평론가인 사가와 아키가 얘기했던 것처럼 ’뭔가 자극을 받으면 단숨에 언어적 메시지로 표현 한다‘는 말이 어쩌면 꼭 들어맞을 수도 있겠다.

김준태 시인이 인터뷰때 자필로 쓴 詩 '아아 오월이여,우리나라의 십자가여'
김준태 시인이 인터뷰 때 자필로 쓴 詩 '아아 오월이여,우리나라의 십자가여'

‘아아 光州여, 우리나라의 십자가여’라는 시가 탄생된 데는 김준태의 직관력과 역사의식, 감성, 그리고 5월의 아픈 현실이 녹아내리고 있다. 5·18의 역사에 오점을 남긴 비극의 현장을 몸소 체험한 뒤 아린 감정과 감정이입이 분출했기에 가능했으리라.

당시 전남고 외국어 교사로 재직했던 그는 자신의 제자들이 “계엄군의 만행을 바라보고만 있을 수 없다”며 중간고사에 응하지 않는 채 학교 담벼락을 넘어 거리로 뛰쳐나갔을 때 눈물을 흘렸다 한다.

두려워서가 아니었다.

이런 세상에서 “시험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라는 제자들의 말에 슬픔과 분노가 자신도 모르게 뺨을 타고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래서 “학생 없는 교사는 존재 의미가 없다”며 학생지도 차원에서...광주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금남로 거리로 나갔다.

금남로 거리에서 광주의 엄마들 다섯 명이 ’우리 새끼들 죽이지 마라, 차라리 우리들을 밟고 지나가라‘며 공수부대 탱크를 향해 돌진하는 장면을 목격하며 더욱 놀랐다.

과거 동학군이 ’긍긍흘흘‘이라는 주문을 외치면서 일본과 관군의 총칼 앞에 맞서 진군한 것처럼 엄마들의 대담한...모성애와 처절한 행동을 보았다는 것이다.

현재의 아시아문화전당 앞 반대편에 보존된 상무관 등지에는 당시 민주주의를 위해 산화한 시민군의 사체들이 즐비하게 널브러져 있었던 게 광주의 상황이었다.

그런 처참한 장면이 혹여 밖으로 새어나갈까 봐 계엄군은 당시 언론사를 폐쇄하고 보도통제에 나섰다.

그렇다면 김 시인의 ’아아 光州여...‘라는 시는 어떻게 광주 밖으로, 아니 세계로 퍼져 나갔을까.

광주항쟁이 끝난 뒤인 80년 6월 2일 당시 전남매일신문사로부터 김 시인에게 황급한 목소리로 원고 청탁이 들어왔다는 것이다. 석간이라 시간에 맞춰 단숨에 글을 쓴 뒤 곧장 신문사로 달려갔다.

당시 계엄군 보도 검열관이 상주해 언론 통제를 하고 있는 터라 김준태가 쓴 시가 보도될 리 만무했다.

하지만 ’광주를 알려야 한다. 계엄군들의 만행과 잔혹함, 그리고 광주의 진실을 밖으로 알려야 한다‘고, 당시 공무국 소속이면서 기자들이 쓴 기사를 일일이 활자 틀에 넣어 조판 하는 직원이 이를 빼돌려 서울로 보냈다는 것이다.

비밀작전 속에 그의 시는 미국, 일본, 대만, 독일, 영국 등 세계 각국의 언어로 번역돼 해외 유력 언론에 보도됨으로써 5·18의 비극적 참상이 세계에 알려지게 된 계기가 됐다.

이런 상황을 모를 리 없는 계엄군 정보요원들과 경찰들로서는 김준태를 백방으로 찾아 나섰다. 그들의 추적을 물리치기 위해 주로 무연고지를 이용, 25일간의 잠행에 들어간 김준태는 여기저기를 떠돌다가 아내와 두 아이 생각에 신안동 자신의 집을 잠시 들렸다가 5분도 안되어 그들에게 체포된다.

서구 화정동 505보안대에서 한 달 가까이 고초를 당했지만 교도소로 끌려가지 않고 여기에서 그들 요구대로 3군데로 보낼 사표서를 쓴다. 곧바로 교단에서 해직된 것은 당연했다.

국제외국어학원, 현대외국어학원, 전일학원, 한림학원 등지에서 거리의 교사로 나선다. 3년6개월 여 만에 영암 신북중으로 복직된 후 과학고를 끝으로 6년간의 중고등학교 영어, 독일어교사로서의 교직생활을 접었다. 광주과학고등학교에서 수업시간을 배당받지 못하고 광주과학관에 파견근무 형식으로 지내다,

1988년에 창간한 전남일보 특집부장으로 스카우트 되면서 언론사와 인연을 맺게 된다.

같은 신문사에서 근무하면서 상사로 모셨고, 요즘도 간간히 만나 부담이 없는 사이인지라 그를 만나자 대뜸 물었다.

김준태 시인께서 생각하는, 말하고자 하는 이른바 '광주정신'을 물었다. 그는 생명, 평화, 공동체정신, 통일로 정리하고 있다.

김 시인 자신이 태어난 해남군 화산면 앞바다엔 ’갈매기 섬‘이 있다. 어릴 적 강제 징용으로 일본에 끌려갔다 돌아간 할아버지가 ’비가 오면 섬이 운다‘는 말을 듣고 자랐다. 6·25때 300여명의 해남사람들을 끌고가 집단학살시킨 무인도가 바로 '갈매기섬'이다.

북한 인민군이 밀고 내려오자 경찰과 군인들이 배를 타고 부산으로 피신하면서 시민들을 죽였다는 것이다.

자신의 고향 인근 대흥사 골짜기에도 150여명이 집단학살(제노사이드) 당한 핏빛 상흔이 서려있는데, 여기에서 일제에 의해 태평양으로 징병 당했다가 탈출한 자신의 아버지가 숨을 거둔 것이다.

그리고는 한참 말을 잇지 못한다.

이런 상황을 직접 목격했던 할머니는 김 시인에게 “미물도 죽여서는 안된다”고 늘상 말했단다. 불교에서 말하는 ’살생유택‘의 가르침이다. 5.18의 경험이 담긴 ’콩알 하나‘란 시도 그 중에 하나다. 이 시는 중학교 2학년 국어교과서에 실려 있다.

어릴 적 유난히 독서를 좋아해 한 동네에서 자랐고, 광주에서 학교를 다닌 선배들을 찾아가 책을 빌려 읽곤 했다.

그의 19권의 시집 중에서 [참깨를 털면서]는 베스트셀러가 됐고, 그중 '콩알 하나'는 전남대 의대 앞에 시비로 세워져 있다.

누가 흘렸을까 // 막내딸을 찾아가는 / 다 쭈그러진 / 시골할머니의 구멍난 보따리에서 / 빠져 떨어졌을까 // 역전광장 / 아스팔트 위에 / 밟히며 뒹구는 / 파아란 콩알 하나 // 나는 이 엄청난 생명을 집어들어 / 강 건너 밭이랑에 / 깊숙이 깊숙이 심어주었다 / 그때 사방팔방에서 저녁노을이 나를 바라다보았다.

또한 현재 고2 교과서엔 ’참깨를 털면서‘ 라는 시가 실려 있다.

할머니의 가르침은 시로 잉태했고, 생명존중 사상으로 이어졌다.

제39회 광주민주화운동 기념식에 참석한 후 묘지에 들러 오월 영령을 위로하는 김준태 시인
제39회 광주민주화운동 기념식에 참석한 후 묘지에 들러 오월 영령을 위로하는 김준태 시인

자신이 겪은 6·25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 5.18광주항쟁 모두가 ‘분단’에서 비롯됐다고 그는 강조한다.

이 땅의 모든 비극의 원인은 일제강점기 식민지문화를 거쳐 ‘분단'에서 기인하고 있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따라서 그는 생명존중과 평화를 향하는 시민들의 의지가 광주정신의 키워드라고 얘기한다. 더욱이 계엄군이 시민들을 향해 총을 쏜 것은 어떠한 이유로든 정당화될 수 없다고 단호하게 말한다.

생명의 위협 속에 광주시민들이 보여준 공동체정신의 ‘하나 됨’은 통일로 이어져야 비로소 완성될 수 있다고 강조한다.

39년 전 광주시민들이 주먹밥을 싸들고 나와 시민군에 나눠주면서 나눔의 공동체 정신을 실천했고, 현재까지도 금남로 1가 전일빌딩 내에 위치한 외환은행에는 단 1달러도 없어지지 않은 게 바로 광주공동체정신이 아니고 무엇이냐고 외려 반문한다.

특히 자신의 ‘금남로 사랑’도 이런 정신 속에서 태어났고, 이게 동기가 돼, 이번 옛 도청 앞 5·18 민주광장에 ‘詩가 있는 꽃벽정원’이 처음으로 설치된 계기가 됐다.

인터뷰를 마무리 하면서 김준태를 한마디로 예기하면 ‘저항시인’이라고 말해도 되느냐고 물었다. 그의 시 ‘아아 광주여, 우리나라의 십자가여’는 선언(매니패스토)적 의미와 메시지를 중시하여 쓰여졌다고 말한다. 그는 “그 시는 광주 오월영령들이 말해준 것을 단지 나는 받아서 썼을 뿐”이라는 것을 몇 차례 강조했다. 이왕 인터뷰 시간이 길어진 김에 당시 기독교인도 아니었는데 ‘십자가’라는 표현을 쓴 것은 무슨 의미였느냐고 쿡, 찔렀다.

십자가는 “누군가가 짊어져야 할 바로 그것, 그해 오월 광주시민들 모두가 짊어진 그것”...“우리 민족 전체가 풀어나가야 할 과제인 ‘통일’을 가리킨다”고 말했다. 광주시민들이 흘린 피와 땀과 눈물...사랑과 정의와 평화, 생명존중과 민주주의 그것을 총칭하는 ‘공동선(共同善)’이 바로 광주정신이라고 말했다. 그의 말은 그 어떤 ‘예언’처럼 들렸다. “5·18광주화운동은 하나의 예술이야. 시민공동체가, 광주시민이 만들어낸, 그야말로 온몸으로 절규했던 예술이야”라는 말이 내내 귓전을 맴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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