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의 발견
봄의 발견
  • 문틈 시인
  • 승인 2019.03.19 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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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날 미세먼지 탓에 바깥 나들이를 못하고 있었다. 오늘 모처럼 날이 청명해 산책을 나갔다가 문득 산수유나무에 노란 꽃이 피어 있는 것을 보았다. 산수유나무는 여기 피어 있노라고 주위에 알리지도 않고 보풀같은 꽃들을 가지마다 피워놓은 채 조용히 서있다.

계절은 어김없이 이 땅에 찾아왔다. 봄이 올 때마다 세월의 빠름을 실감한다. 야속할 정도로 계절은 대자연이 작성한 시간표대로 정시에 도착한다. 그동안 아무 한 일도 없는데 마치 채권자가 빚 받으러 찾아온 것처럼, 봄은 내게 빚을 갚으라 하는 것만 같다.

나는 지금껏 이 선물같은 봄을 몇 번째나 맞이했던가. 공으로 오는 봄에게 나는 얼마나 많은 빚을 졌던가. 그러나 나는 빈털터리다. 봄을 맞아들일 준비를 하지 못했는데 갑자기 계절이 들이닥친 느낌이다.

남녘에는 개나리, 매화, 진달래, 다른 꽃들도 한창이라는 소식이다. 어제는 숲 속에서 딱따구리가 딱, 딱, 딱 나무의 표피를 쪼는 소리를 들었다. 새 집을 마련하는 소리일 것이다. 아니, 아직 겨울잠에 있는 숲의 나무들을 깨우는 소리일지도 모른다.

곧 다른 새들도 날아와서 겨우내 공들여 연습한 노래를 다투어 부를 참이다. 새들이 노래를 하면 그 소리에 땅 속 벌레들도 깨어 나온다고 한다. 대자연은 우리가 모르는 운행 장치를 작동시켜 만물이 서로 빈 틈 없이 조화를 이루게 하는가보다.

‘농가월령가’는 이때의 풍경을 ‘반갑다 봄바람이 의구히 문을 여니 말랐던 풀뿌리는 속잎이 맹동한다’고 실감나게 노래한다. 개천을 따라 먼 산을 바라보며 한참 걸었다. 영을 넘어 불어오는 눈녹이 바람이 뺨을 부드럽게 스쳐 간다.

길섶에는 가물가물 푸른 기운이 감돈다. 태양이 더 가까이 땅에 볼을 부비기 시작하면 아지랑이가 피어오를 것이다. 길섶에선 파아란 풀잎들이 생명의 빛을 발하고 있다. 봄이 오는 길목에서 나는 온몸의 기운이 생동하는 것을 느낀다.

마구 내달려보고 싶고, 소리쳐 노래를 부르고도 싶다. 내가 심히 봄을 타는가보다. 겨울 동안 헐벗은 만물이 새롭게 제 모습을 단장하는 모습을 목격하며 내 심장은 쿵, 쿵, 뛰는 것만 같다.

나는 봄에게 아무것도 줄 것이 없는데 계절은 내게 이토록 한가득 감격을 안겨준다. 피천득 시인의 말대로 살아서 수십 번씩이나 봄을 본다는 것은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청춘은 봄이라지만 봄은 진정으로 알아보는 이에게 청춘을 일깨워준다. 이걸 다른 말로 하면 우리 안에 있는 잠들어 있는 봄을 바깥 봄이 와서 짝하여 일으켜 세운다는 뜻이다.

학다리 들에서 봄을 본 사람은 학다리 들에서 자신 안에 있는 봄을 깨우게 된다. 바깥 봄이 안의 봄을 짝하는 것은 나이와 상관없다. 날마다 봄이 와서 산에 들에 갖가지 색칠을 하는 모양을 보고 있으면 내 안의 봄도 들썩인다.

사람들아, 세상에 봄을 보는 것보다 더 아름다운 일이 어디 있을까보냐. 죽은 나무가 살아나고, 마른나무에서 꽃이 피어나고, 얼어붙은 땅에서 새싹이 솟아나는 봄을 보고 옛사람들은 알아차렸다.

사람은 죽는 것이 아니라 다시 부활한다고. 그렇게 불멸을 믿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예수는 봄을 데려온 분이다. 죽었다가 살아났다는 것은 봄을 말하는 것이므로. 이 어찌 봄을 엄청난 기적이라 아니 할 것이랴.

그런데 봄날은 간다. 봄은 시작을 고지하고 서둘러 간다. 아무리 봄이 아름답다고 찬란하다고 한들 언제까지나 봄일 수는 없다. 봄이 나를 일으켜 세우는 동안에 나는 봄에게 무엇인가를 갚아야만 한다.

내가 봄에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을까. 올 봄을 마치 나의 전 생애처럼 살아내는 일이라 할까. 커다란 선물을 받아들고 기뻐서 어쩔 줄 모르는 아이처럼 상기되어 나는 지금 포장지를 풀고 있다.

봄이 가져온 선물들이 가득하다. 불멸에 대한 믿음, 다시 시작하는 생에 대한 사랑, 그 안에 새싹같은 생명의 불이 푸르게 타오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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