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기행(6) 메이지 신궁에서⑤ 정한론 정변
도쿄기행(6) 메이지 신궁에서⑤ 정한론 정변
  • 김세곤 역사칼럼니스트
  • 승인 2019.03.04 0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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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곤 역사칼럼니스트
김세곤 역사칼럼니스트

1873년 5월 하순, 부산 초량 왜관에 주재한 일본 외교관이 외무성에 조선관리가 일본을 모욕했다고 보고 했다. 이에 각의가 열려 초량 왜관의 거류민 보호를 위한 군대 파병 등이 논의되었다.

이 자리에서 사이고 다카모리(1828~1877)는 즉시 전권대사를 파견해서 그 사절이 폭거를 당한다면 군사행동을 하는 방안을 주장하고 자신을 전권대사로 보내줄 것을 희망했다.

하지만, 각의는 결정을 보지 못했다. 이러자 사이고는 대신들을 설득하여 대세는 정한론으로 기울었고, 8월 17일에 각의는 사이고를 조선 사절로 파견할 것을 결정했다. 태정대신 산조는 하코네에 머물고 있던 메이지 천황을 만나 재가를 요청했다. 그런데 천황은 이와쿠라 사절단의 귀국을 기다려 협의하고 다시 주청하라고 명했다.

이 시기에 정한론이 대두된 배경에는 급격한 내정 개혁으로 사족(士族)들의 반정부 감정이 격화되었다. 1871년 8월 폐번치현(廢藩置縣) 이후 각 번의 사족이 해산되자 사족의 불만은 높아졌다. 더구나 1872년 11월에 국민개병제 원칙이 발표되고 1873년에 20세 남자의 3년 병역의무를 규정한 징병령이 공포되자 전투 집단인 사족들은 실직하게 되었고, 불평사족(不平士族)의 수가 60만 명이 넘었으며 가족까지 합하면 300만 명이나 되었다.

이런 사족의 불만 고조는 자칫하면 내란이 일어날 지경이었는데, 사족에 우호적인 사이고는 사족의 불만을 조선 침략으로 잠재우고자 하였다.

9월 13일에 이와쿠라 사절단이 귀국하였다. 이와쿠라 사절단은 구미 순방에서 내치우선을 절실히 느꼈다. 따라서 전쟁으로 이어질 사이고의 조선 사절 파견에 반대했다.

10월 14일에 각의가 열렸다. 이 각의에서 사이고와 이와쿠라는 격렬한 논쟁을 벌였다. 이와쿠라 측은 사절 자체는 인정하되 그 실행은 러시아와의 현안인 사할린 문제가 해결된 뒤로 미루자는 파견 연기론을 내놓았고, 사이고는 사절 파견이 시급하다고 주장했다.

논쟁이 격화되자 산조는 참의들의 의견을 물었는데 대부분의 참의는 사이고의 의견에 찬성했고. 오쿠보만 파견 연기를 주장했다. 하지만 산조는 전원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이유로 다음 날 결론을 내리기로 하였다.

15일 오전 10시에 각의가 개최되었다. 태정대신 산조는 고민했다. 다수결로 하면 즉각 파견 결정을 내려야 하고, 이와쿠라의 뜻을 고려하면 결정을 연기해야 했다. 하지만 결정을 연기 한다면 육군대장을 겸한 사이고와 군 지휘관의 반발이 심할 것이 분명했다. 결국 산조는 사이고의 주장대로 즉각 사절 파견을 결정했다.

이러자 이와쿠라 측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오쿠보와 기도는 사표를 제출했고, 이와쿠라도 사의를 표하고 출근을 거부했다.

그러자 산조는 이와쿠라 집을 두 차례나 찾았고, 10월 18일 아침에 갑자기 ‘정신착란’에 빠졌다. 20일에 메이지 천황은 위문 차 산조집을 방문했다. 이어서 이와쿠라 집으로 가서 그를 태정대신 대리로 임명했다. 모종의 모의가 있었다.

10월 23일에 이와쿠라는 각의의 결정을 번복하여 내치 우선과 사절 파견의 연기를 천황에게 상주하였다. 24일에 천황은 즉시 재가했다.

메이지 천황 어영정
메이지 천황 어영정

이러자 사이고 · 이타가키 · 에도 등 소위 정한파는 분노했다. 그리고 모두 사퇴하고 고향으로 돌아갔고, 오쿠보 도시미치가 정권을 장악하였다. 일본 역사는 이를 ‘정한론 정변’이라 부른다.

한편, 에토와 사이고는 메이지 정권에 반기를 들었다. 먼저 저항한 이는 에도 신페이였다. 그는 1874년 2월에 사가의 변을 일으켰지만 패하여 효수되었다. 가고시마에서 반정부 세력을 구축한 사이고는 1877년에 세이난 전쟁에서 패배하여 자결했다.1)

세이난 전쟁은 최후의 사무라이 반란이었다. 톰 크루즈가 주연으로 나오는 영화 ‘라스트 사무라이’가 생각난다. 아이러니하게도 오쿠보도 1878년에 세이난 전쟁에 참여한 사족 6명에게 암살당했다. 그의 나이 49세였다.

여기에서 기억할 일은 일본은 정한론을 연기한 것이지, 포기한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1875년 9월에 일본은 군함 운양호를 강화해협에 침입시켜 포격사건을 일으킨 다음 무력시위를 계속하여 1876년 2월에 ‘불평등 강화도 조약’을 체결시켰다.

1) 메이지 정부는 사민평등의 원칙에 따라 무사에게 지급하던 녹봉을 폐지하고 1876년에 폐도령을 공포하여 무사의 상징인 칼의 휴대를 금지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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