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기행(5) 메이지 신궁에서④ 정한론
도쿄기행(5) 메이지 신궁에서④ 정한론
  • 김세곤 역사칼럼니스트
  • 승인 2019.02.25 0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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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곤 역사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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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3년 5월 하순, 부산 초량 왜관에 파견된 일본 외교관은 외무성에 보고서를 보냈다. 조선관리가 일본정부를 모욕하는 문서를 왜관에 게시했다는 것이다. 동래부사가 일본 상인의 밀무역을 단속하기 위해 초량왜관 출입을 금한다고 게시한 문서에는 “요사이 저들이 하는 짓을 보니 가히 무법지국이라 할 만하다”는 표현이 있었다. 일본 사람들에게 이런 표현은 일본에 대한 모욕이자 메이지 천황에 대한 모욕으로 간주됐다.

이 내용이 알려지자 일본 조야는 조선 파병 여론이 비등했다. 오만하고 무례한 조선에 본때를 보여주고 일본의 국위를 선양하기 위해서는 파병이 필요하다는 것인데, 이런 주장을 정한론(征韓論)이라 한다.

메이지 천황이후 한일외교관계를 살펴보면 1868년 말에 메이지 정부는 조선에 국서를 보냈다. 일본의 최고 권력자가 막부 쇼군에서 메이지 천황으로 교체되었음을 알리기 위해서였다.

메이지 정부는 이 국서를 대마도주를 통해서 보냈는데, 대마도 사신은 1868년 12월 19일에 일본 국서를 가지고 초량왜관에 도착했다.

그들은 관례대로 초량왜관에서 왜관의 책임자인 훈도 안동준에게 국서를 전달했다. 그런데 국서에는 ‘대일본(大日本)’, ‘황조(皇朝)’, ‘황상(皇上)’ 등의 표현이 있었다. 이는 중국 황제나 사용하는 용어로서 기존의 일본 국서에는 전혀 사용되지 않았다. 일본은 천황의 나라 일본을 부각시키려는 의도였지만 조선은 이런 국서가 관행에 어긋난다고 아예 접수조차 하지 않았다.1)

1870년 11월에 메이지 정부는 또 다시 조선에 국서를 보냈다. 이번에는 외무성의 외교관 3명까지 파견하였다. 일본 외교관들은 1년 가까이 머물렀지만 국서를 접수시킬 수 없었다.

1872년 1월에도 일본 외교관이 초량 왜관에 도착하여 국서를 접수시키려 했으나 역시 훈도 안동준에게 막혔다. 5월까지 기다린 그들이 안동준에게 들은 말이라고는 “나라 안에서 널리 의논을 들어본 다음에야 답을 줄 수 있다는 것이 조정의 명령인데, 그 기한은 예약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일본은 세 차례나 조선에 국서를 보냈지만 모두 거절당한 것이다.

이러자 5월 27일에 일본 외무성의 외교관을 포함한 56명이 초량왜관을 박차고 동래부로 난출(闌出)을 감행했다. 불법으로 왜관 밖으로 나간 것이다. 6월 1일 동래부에 도착한 이들은 6일에 동래부사에게 국서 전달을 요구했지만 희망이 없음을 알고 초량왜관으로 돌아갔다.

일본인 56명의 난출 사건은 1683년(숙종 9년)에 맺은 계해약조를 적용하면 모두 사형이었다.2) 그러나 조선은 그럴 힘도 배짱도 없었다.

우에노 공원에 있는 사이고 다카모리 동상(사이고는 대표적인 정한론자이다.)
우에노 공원에 있는 사이고 다카모리 동상(사이고는 대표적인 정한론자이다.)

한편, 난출에 가담했던 일본 외무성 관리들은 1872년 6월 17일 부산을 떠나 일본으로 귀국했다. 귀국 후 외무성 관리들은 앞장서서 정한론을 주장했다. 말로 안 되니 무력을 써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세 차례 국서를 보냈다가 모두 거절을 당한 메이지 정부 사람들에게 정한론은 급속도로 퍼져 나갔다.

그 결과는 일차적으로 초량왜관 접수로 나타났다. 1872년 9월 16일에 외무대승 하나부사 요시모토가 군함과 선박 두 척에 70명의 병력을 이끌고 부산에 왔다. 하나부사는 그동안 대마도주의 관리 하에 있던 초량왜관을 메이지 정부 직속으로 접수했다. 명칭도 ‘대일본국 공관’으로 바꾸었다. 물론 일본의 조치는 조선에 통보하지도 않고 양해도 구하지 않은 일방적인 조치였다.

일본이 접수한 초량 왜관은 대마도 출신뿐 아니라 다른 지역 상인들도 자유롭게 출입이 허용되어 밀무역이 성행했다. 이를 조선으로서는 가만히 두고 볼 수는 없었다. 1873년 봄에 동래부사는 ‘잠상(潛商) 출입금지령’을 게시하여 조선과 일본 사람 모두에게 널리 알렸다. 하지만 그 결과는 정반대였다. 일본인들이 문구를 트집 잡아 파병을 운운 한 것이다.3)

1) 조선의 국서 접수 거부 배후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침략 이후 일본에 대한 불신도 내재되어 있었다.

2) 계해약조에는 ‘일본인이 왜관 밖으로 무단으로 나갈 경우 사형에 처한다.’고 적혀있었다.

3) 신명호 지음, 고종과 메이지의 시대, 역사의 아침, 2014, p74-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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