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단 40년 아픔 딛고 우뚝 선 서용규 광주시 장애인체육회 수석부회장
분단 40년 아픔 딛고 우뚝 선 서용규 광주시 장애인체육회 수석부회장
  • 박병모 기자
  • 승인 2019.02.24 19:01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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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6 사태 휴전선 GOP 근무 당시 비상 출동 중 쓰러져 생사기로
국가유공자로 2년 만에 퇴원 후 ‘후천성 장애’ 극복
이용섭 시장, 동병상련의 장애인 체육회 수장으로 13년 만에 발탁

[시민의소리=박병모 기자] “살다보니 이런 날도 있구나. 눈물이 앞을 가렸어요. 생사의 기로에서, 절망 속에서 ‘후천성 장애’라는 인고의 세월 을 버텨왔지요. 다시는 눈물을 훔치지 않으리라 굳게 다짐했는데...” 왠지 모를 기쁨에 벅찬 나머지 저절로 눈가를 적시는 걸 의식한 듯 한참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취임식 대신 직원 상견레를 가진 뒤 인터뷰에 응한 서용규 광주시장애인 체육회 상임 부회장
취임식 대신 직원 상견레를 가진 뒤 인터뷰에 응한 서용규 광주시장애인 체육회 상임 부회장

그의 눈물 속에는 13년 만에, 정상인이 아닌 같은 처지의 장애인이 수장이 됐다는 의미가 물씬 담겨있다. 광주시장애인체육회 이사회 의결을 거쳐 수석 부회장에 임명된 서용규씨(62)가 바로 그다.

취임식을 직원 상견례로 대신하고 곧바로 업무를 시작한 서 부회장을 다음날 22일 찾았다. 몇 년 전 새로 지은 건물인지라 입구에 들어서자 탁구와 배드민턴을 하는 장애인들의 요람인 듯한 종합 체육관이 보였고, 2층에는 트레이닝 센터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를 만나자 마자 직감적으로 ‘이목구비가 또렷한 잘생긴 얼굴’이구나 싶었다. 이제 갓 들어온 축하 화분처럼 밝고 촉촉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하지만 그가 앉은 자리 곁에는 자신의 아픔을 오롯하게 지탱해온 지팡이가 친구처럼 지키고 있었다.

서 부회장은 이를 금세 알아차린 듯 자신의 아픔을 털어놓는다. 역사의 변곡점이 된 10‧26 사태 다음날로 시계바늘을 돌렸다. 그는 대한의 장한 아들로 군대에 입대했고, 북한군이 뻔히 보이는 비무장 지대에서 근무하게 된다. 두발을 힘차게 딛고 경계 근무를 밤낮없이 섰다.

그러던 지난 79년 10월 27일, 육군 1사단이 자리한 문산의 GOP에서 북한군으로부터 자신의 운명을 가르는 총성이 울렸다. 비상경계 사이렌이 울리면서 부분 교전이 시작됐다. 전역이 얼마남지 않은 육군 병장 때였다.
완전군장을 메고 총탄이 오가는 현장으로 달려가던 중 쓰러지고 만다. 자신의 경추 6번과 7번을 다쳤고, 진단결과 GB 증후군(길랑바리 증후군)으로 밝혀졌다.

국군수도통합병원에서 입원한 지 15일 만에 의식을 되찾았다. 그래서 처음 시도한 게 기도확장을 위한 기관지 절제 수술이었다. 심폐기능이 악화될 거라고 우려했던 수술이 잘돼 15일 만에 간신히 눈을 뜨게 된다.
자신의 몸을 허공으로 들어 올리는 꿈을 꾸다 놀란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낮인지 밤인지 모를 적막감 속에서 형광등 불빛만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생사의 기로에 서 있는 특별한 환자만이 그런 꿈을 꾼다는 군의관 말이 야속하기만 하다.

자신의 얼굴을 제외한 상‧하반신이 마비돼 옴싹 달싹도 못한 처지다 보니 그럴 만도 하겠다 싶었다.
당시 상황은 목만 살아있고 숨만 ‘깔닥 깔딱’ 거리던 이른바, 손가락 발가락도 움직이지 못하는 ‘식물인간’ 그 자체였다.

목에 기브스를 한 채 1년 6개월을 버티다 보니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기적이 보였다. 2년여의 투병 끝에 퇴원을 하게 됐다는 말을 듣은 즉시 서 부회장의 눈빛을 지켜봤더니 생에 대한 집념이 강한 듯 싶었다.

군대 입대하기 전 그는 부산시 영도구 국립수산진흥원에서 말단 공무원 생활을 했다. 자유로운 영혼이 되고 싶어 근무지를 부산으로 택했다. 완도 수산고 3학년 때 5급 을로 합격했으니까 지금으로 따지면 9급 공무원에 해당된다.
매일 병상에 누워 자신의 인생이 이대로 끝나는구나 싶어 침대에 얼굴을 파묻고는 하염없이 눈물을 훔치기도 했단다.

‘궁하면 통한다.’ ‘죽으라는 법은 없다’는 신념을 불어넣어 준 이가 바로 오늘의 인생 동반자요, 짝꿍인 박윤숙(58세)여사다. 퇴원 후 고향인 완도 한동네에 살던 누나 집에 기거하면서 재활치료를 했다. 함께 자란 3년 아래의 그야말로, 착하디착한 여인에게 결혼을 하자고 청한 건 서 부회장이었다. 병문안을 와 뒷바라지를 하면서, 그 때 읽어보라며 수줍게 건네준 게 ‘나사렛 예수’ 라는 책을 건네 용기를 북돋아 준 여인이라서다. .
그런 그녀는 서 부회장이 자꾸만 왜소해지고 나락으로 떨어져가는 마음을 단단하게 붙들어 매게 해주었다. 어디를 가든 든든하게 동행을 해주었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하늘이 맺어준 천생연분’이라며 서 부회장은 환하게 웃는다.

마음 한켠으론 복직해서 공무원으로 돌아갈까도 생각했단다. 하지만 마음을 바꿔 먹었다. 장애인을 위해 일생을 바치겠다고 다짐했다.
정부가 국가유공자로 대우해준 만큼 자신처럼 동병상련의 아픔에 울고 있는 장애인을 위해 삶을 바치겠노라고...

재활 끝에 그는 광주로 올라온다. 늦깍이로 대학문을 두드린다. 84년 전대 중문과에 입학한다. 8년 아래 후배들과 다니다 보니 형님 대우를 받은 ‘만학도’였다.
장애인이다 보니 인생 길을 새롭게 개척하는 관문인 취업은 하늘의 별따기 였다. 한학에 대한 열정을 더하기로 했다. 대학원에 입학했다. 
그 덕분에 2010년 광주대에 이어 조선대 평생교육원에서 한문학 강의를 한데 이어 최근에는 사회복지사 자격을 취득한 뒤 동강대에서 외래교수로 초빙돼 강의를 해왔다.

삶의 의미를 되찾고 어떤 역할을 할까 궁리 끝에 89년에 무등자립회를 결성한다. 그때부터 국가유공자 및 장애인 복지운동에 발을 내딛었다. 광산구 신창동 신가부영아파트에 자신과 같은 처지의 장애인들과 공동입주를 한다. 초창기 반대가 심했지만 설득에 나섰다.
국가보훈처에서 20명이 함께 살면 자립혜택을 볼 수 있어서다. 한 사람을 채우지 못해 그다지 혜택을 보지 못했지만 공동체 생활을 하면서 서로 재활의지를 불태우고 가슴 속 희망의 불씨를 살리려 했던 나날이 지금 생각해보면 무척 행복했단다.

2층에 자리한 트레이닝 센터를 둘러보는 서용규 광주시장애인 체육회 상임 부회장
2층에 자리한 트레이닝 센터를 둘러보는 서용규 광주시장애인 체육회 상임 부회장

장애인 단체와의 인연은 여기로부터 시작된다. 무등자립회 회장이란 자리가 광주시장애인총연합회라는 단체의 당연직 이사가 되기 때문이다. 2012년 말 장애인총연합회장 후보로 나가 압도적인 표차로 당선됐다.
자연스레 광주시립장애인복지관 이사장도 맡았다. 16개 시ㆍ도 장애인 단체 중 5명을 선거로 뽑는 한국장애인총연맹공동대표를 지냈다.

서 부회장은 그때부터 선후배나 기업인을 만나면 인간적인 호소에 나섰다. 만족하지는 않았지만 기여를 했다고 자평한다. 장애인을 위한 용품이나 체육복 보다 중요한 것은 후원자 600명을 가입시켜 매월 만원씩의 후원계좌를 만들었던 걸 가장 큰 보람으로 여긴다. 거기에 더해 지난 4년간 백미 6,000포대를 후원받아 중증장애인에게 제공했다.

이런 보람 있는 일을 하게 된 계기는 다름 아니다. 2008년 일부 장애인들이 탁구와 배드민턴을 하면서 바닥에 앉아 라켓을 잡고 운동하는 걸 지켜보며 감동을 받은데서다. 인간으로 태어나 이렇게 아름답고 선한 모습이 여기에 있었구나 하는 감흥이 가슴으로부터 솟구쳐 올라왔기 때문이다. 이 분들을 위해 역할이 주어진다면 최선을 다하겠다고 마음을 굳게 다진다.

한문을 줄곧 사용하기에 자신의 처한 입장을 한자성어로 대변해달라고 요청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중용과 명심보감에 이런 내용이 있노라고 얘기한다. 자신의 주머니에서 펜을 꺼내 들고는 한순간에 적어 보인다.

“혜(惠)이(而)불(不)비(費)(은혜를 베풀되 자신은 낭비하지 않는다)“요, “굴(屈)기(己)자(者)는 능(能)처(處)중(重)”이라고.
그리고는 뜻풀이를 해준다. “몸을 굽히고 겸손 하는 자는 중책에 처해진다”는 의미라고...

20개 가맹단체로 구성된 광주시장애인체육회 수장이 된 그는 직원과의 첫 대면에서 밝힌 것처럼 이용섭 시장이 내세운 “정의로운 도시를 만드는데 한 축을 담당하고 싶다.” “장애인의 처우개선과 인권향상을 위해 앞장서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장애인 선수들이 원하고 필요한 일이면 무슨 일이든 하겠다는 얘기다. 성격상 쑥스러움을 잘 타는 그였다. 하지만 이제 공적인 자리에 오른 만큼 ‘한번 죽었다 태어나 다시 부활했는데 두려울 게 없다’는 자세로 일하겠다는 것이다.

서 부회장은 그러면서 자신을 중용해준 이용섭 시장에게 고맙다는 말을 잊지 않는다. 그래서 이 시장과 어떤 관계냐고 얄궂게 물었다.
2016년 총선 때 얘기를 꺼낸다. 당시 이 후보는 표를 얻기 위해 자신이 회장으로 있던 장애인총연합회 사무실로 찾아왔었던 비하인드 스토리를 들려준다.
흔히 선거 때가 되면 표를 얻기 위해 장애인협회를 방문한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아는 서 부회장인지라 이 시장이 첫 대면한 자리에서 어떤 행동을 보일까 궁금했단다. 20여 분 동안 둘만의 직접적인 대화는 하지 않았다. 여느 후보처럼 자신의 스팩을 자랑하거나 표를 달라고 손을 내밀 걸로 알았는데 이 시장만큼은 그렇지 않더라는 것이었다.

곰곰이 지켜봤더니 이 시장은 다른 사람의 말을 경청하려 했고, 다른 정치인과는 결이 다른 순수한 사람이라는데 마음이 쏘옥 갔다는 얘기다.뭔가 큰일을 할 사람이라는 생각에 자신이 먼저 ‘찜’을 했고, 스스로 알아서 도와주고 싶어 앞장섰다고 털어놓는다. 외려 그런 속사정 까지 질문해도 되느냐는 투로 반박한다.

그러면서 장애인을 대표하는 5명의 회장단이 모여 논의를 한 뒤 이 시장을 찾아가 이번만큼은 수석 부회장으로 장애인을 꼭 임명해달라는 의견을 전달했다고 말을 이어간다.

이 시장은 그런 하의상달식 요청을 받아들인다. 그 수렴결과 광주시장애인체육회 창립 13년 만에, 분단 비극의 아픔을 딛고 일어나 40년의 인고의 세월을 버틴 서 부회장에게 이 시장은 방점을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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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찌 2019-02-28 21:13:56
    정말 대단하셔요! 누구보다도 장애인들을 위해 앞장서시고 베푸시는 모습이 너무 존경스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