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재기 된장국
양재기 된장국
  • 문틈 시인
  • 승인 2019.02.18 1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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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엔 집에서 알루미늄으로 만든 그릇들을 많이 썼다. 가볍고 얇은 양은 그릇들이 다들 집안에 몇 개씩은 있었다. 흔히 양재기라고 부른 그 양은 그릇은 값이 싸고 가볍고 깨지지 않아서 썩 유용했다. 흠이라면 잘 찌그러지는 점이었는데 그 때문에 되나캐나 사용해도 좋았다.

양은 그릇은 알루미늄 성분이 나온다고 해서 지금은 거의 외면당하고 있다. 다른 더 좋은 그릇들이 나와 밀려나기도 했지만. 내가 양은그릇을 잊지 못하는 것은 그 그릇에 어머니가 자주 만들어주시던 된장국 때문이다.

보통 된장국을 끓일 때면 온 식구가 먹을 수 있도록 냄비나 뚝배기 그릇에 끓였는데 가끔은 특별히 어머니는 나를 위해 작은 양재기에 1인용 된장국을 끓여주셨다.

내 기억 속에서 어머니의 양재기 된장국 끓이기는 이렇다. 가마솥에 밥을 안치고 아궁이에 불을 땐다. 작은 양재기 그릇에 8부쯤 물을 붓고 두 숟갈쯤 된장을 잘 푼다. 가마솥이 솥뚜껑 사이로 뜨거운 김을 내뿜기 시작한다.

그때, 어머니는 가마 솥뚜껑을 열고 양재기 된장국을 익어가는 밥 위에 얼른 놓고는 솥뚜껑을 닫는다. 잠시 후 밥물이 거품처럼 넘쳐 솥뚜껑 사이로 새어 나온다. 이어 밥 익는 냄새가 풀풀 퍼져 나온다. 밥이 다 되었다.

솥뚜껑을 열면 김이 안개처럼 나오고 어머니는 그 속에서 양재기 된장국을 꺼낸다. 간단한 된장국 만들기 과정이다. 특이한 것이라면 밥이 다 되기 전에 양재기 된장국을 밥솥 안에 넣어둔다는 것.

그런데 이 된장국 맛이 천하 진미다. 솔직히 말해서 일평생 먹어본 음식 중에서 양재기 된장국보다 더 맛있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지 않는다. 재료로 단지 우물물과 집된장 말고는 아무것도 들어간 것이 없는 이 간소한 된장국이 어찌 그리 맛이 있었을까.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어머니의 아들 생각하는 마음이 그 양재기 안에 듬뿍 담겼을 것인데다 다음으로 밥이 가마솥에서 한창 익어가는 중에 밥물이 그 양재기 안에 섞여 들어간 탓이 아닌가 싶다.

밥은 쌀이 귀한 시절이라 보리가 7부, 쌀이 3부 정도 비율로 안친 것이었는데 보리와 쌀이 밥으로 익어가는 과정에서 곡식의 양분이 빠져나와 된장국 속으로 스며들어 맛있는 된장국을 만들었을 것이다.

그러니 어머니의 양재기 된장국 제조 비법은 가마솥과의 협업에 있다. 어머니는 어떻게 밥짓는 중간에 양재기 된장국을 가마솥에 슬쩍 끼어 넣는 아이디어를 생각해내셨을까.

어머니는 밥을 안칠 때 가마솥 아래 깔린 보리 위에 쌀을 안쳤는데 내 밥그릇에는 애초 보리와 쌀의 비율과는 달리 보리밥보다 쌀밥을 더 퍼 주셨다. 내가 다른 식구들 눈치를 볼 정도로 그랬다.

몸이 약한 당신의 맏이를 보살피려는 어머니의 지극정성이었을 것이다. 양재기 된장국이 있으면 다른 반찬은 필요가 없을 정도로 밥맛을 완성시키던 양재기 된장국!

뜨거운 된장국을 한 숟갈 입에 넣으면 입안 가득히 적시는 깊은 맛이 아찔할 정도로 입안의 모든 미뢰(味蕾)를 깨우고 식욕을 살리는 느낌이 온몸 곳곳으로 퍼져나간다.

뭐라고 하면 좋을까, 어머니가 주시는 두 번째 모유(母乳)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으리라. 어느 시인의 비유를 들어 말한다면 ‘내 몸의 8할은 된장국’이라고 해야 할 만큼 양재기 된장국은 어린 시절 시냥고냥한 내 몸과 마음을 살리는 소울푸드였다.

요즘은 가마솥 대신 전기밥솥 세상이 된지라 그 시절과 같은 된장국을 만들려야 할 수 없다. 게다가 그런 양재기 같은 것도 없다. 무엇보다 양재기 된장국 원조인 어머니가 너무 나이가 들어서 그 된장국을 만들 수도 없다. 지금은 이미 그런 시절이 아니다.

어머니, 양재기, 집된장, 우물물, 가마솥, 이런 이름들이 한 꾼에 만든 양재기 된장국이 서러울 만큼 그리울 때가 있다. 어째 이런 사소한 된장국이 자주 생각나는지 모르겠다.

아마도 인제 나도 나이가 들어가는 탓이리라. 어머니의 사랑이 영혼을 감싸주던 아득한 깨복쟁이 시절의 추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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