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읍우도농악의 꽃 중의 꽃, 설장고
정읍우도농악의 꽃 중의 꽃, 설장고
  • 김상집 고전한문번역가
  • 승인 2019.02.11 1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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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 연휴 마지막 날인 2월 6일 오후 동구 금남로 광주YMCA 2층 무진관에서 ‘2019 민주가족 합동세배’가 열렸다. 이날 행사의 식전공연으로 1987합창단 박세향 총무가 설장고 공연을 선보였다. 박세향 총무는 김동언(1940년생, 무형문화재 제17호)에게 설장고를 사사받았다고 한다. 김동언은 김오채(1925년생)에게서 사사받았고, 김오채는 김만식(1915년생)에게서 사사받았다. 김만식은 장성 출신의 최화집(1870년생)에게서 사사받았다고 한다.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설장고’가 무엇인지 잘 모르고 있는 것 같아 지면을 빌어 소개하고자 한다.<필자 주>

김상집 고전한문번역가
김상집 고전한문번역가

설장고, 또는 설장구춤은 상쇠와 장구가 둘이서 놀이판 가운데 나와 서로의 가락을 주고받으며 놀던 것이었으나, 전라북도 정읍의 유명한 장구잽이인 이봉문과 김홍집에 의하여 오늘날과 같은 장구-혼자 나와 기량을 뽐내는 독무 형식-로 발전되었다고 보고 있다.

여기에서 쇠잽이와 장구만이 아니라 북과 징까지 나와 사물놀이로 연희하는 것은 김덕수의 사물놀이라 하는데, 이는 관객과 연희자가 구분되지 않는 전통적인 공연과는 별도의 것으로서, 앉아서 보여주는 서구식 무대 연희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설장고란 풍물에 들어가기 전에 사당패 가운데 가장 기량이 뛰어난 상쇠와 장구잽이가 먼저 나와 한껏 기량을 선보인 다음 본격적으로 진법을 펼치기 때문에 독립된 양식이 아니라 요즘으로 치면 식전행사의 의미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설장고, 또는 설장구춤은 서서 장고만 가지고 홀로 연희하는 것을 가리키는데, 이는 이봉문이 19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 기념 경축 제1회 전국농악경연대회에 설장구로 참가하여 최고상을 받음으로써 설장고가 하나의 장르로서 자리하게 된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경축하기 위해 서울 창경원에서 열린 제1회 전국농악경연대회와 이어 2회 대회에서 연달아 정읍농악이 대상을 받았을 때 이봉문이 대포수인 전재성을 설득하여 참가할 수 있었는데, 이봉문은 원래 양인 출신으로 전재성에게서 장구를 전수받았다.

전재성 대포수
전재성 대포수

전재성(1897~1976)은 대금, 거문고, 피리 등 삼현육각뿐 아니라 쇠잽이로도 명성이 드높았다. 당시 정읍농악대의 리더인 대포수였다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대포수는 상쇠와 함께 판을 이끌어 나가는 잡색의 리더격 인물로 모든 기명을 다 알아야 하고, 판굿의 끝판에 상쇠와 함께 도둑잽이 놀이를 이끄는데, 특히 만담을 잘해야 한다.

전재성은 호적에는 전홍석의 자(子)로 나와 있는데, 이 전홍석은 전학술로서 천안전씨 세습무계의 종손의 신분으로 김도삼, 최화집과 더불어 정읍우도농악을 이끌며 각종 기명에 두루 통달했으며, 특히 쇠잽이와 장구로는 그를 따를 자가 없었다고 전한다. 전재성은 1921년 정읍 입암면 천원리에서 필암서원으로 호적을 옮기게 되는데, 필암서원의 악공으로 자리잡아 서원 제향의 악을 맡았다.

최화집은 1870년대 전남 장성에서 출생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주로 영무장(영광, 무장, 장성) 지역에서 전문적인 농악패의 상쇠로 활동했다. 1946년 창경궁에서 개최된 전국농악경연대회에 전라남도 대표팀의 상쇠로 참가하여 개인상을 수상했다.

화려하고 장엄한 정읍우도농악

최화집과 김만식, 김오채, 김동언에 이르는 전수과정은 갑오년 동학혁명과 더불어 탄생한 화려하고 장엄한 정읍우도농악의 발전과 궤를 같이 한다.

정읍우도농악은 익산, 김제, 정읍, 부안, 옥구, 고창, 영광, 함평, 나주, 장성, 광주 등지에 전승되어온 마을 및 지역 농악의 공통된 특징을 중심으로 하여 일컫는 명칭이다. 다시 말해 호남 지역 서부 평야지대의 농경문화적 성격이 공연 형식과 내용에 반영되어 광범위한 지역에서 전승되어온 농악을 정읍우도농악이라 한다.

이러한 정읍우도농악은 1900년대 와서 정읍의 김도삼, 김홍술, 부안의 김바우, 장성의 최화집 등의 상쇠에 의해 더욱 발전하게 되었다.

김도삼(1876~1962)은 정읍시 감곡면 유정리 출신으로 김제시 용지면 불노리 근처인 부교리에서 오랫동안 살았다고 한다. 김도삼은 정읍농악의 시조로 알려져 있는 인물로, 정읍시 입암면 대흥리/마석리 보천교에서 농악을 장려하고 전국의 농악 명인들을 불러들이자, 이때 이 보천교 걸궁에 참여하여 상쇠로 이름을 얻게 된다. 그에게는 농악의 원문서가 있었다고 전하며, 진법에 능했다고 한다.

김홍술은 1896년께 정읍시 입암면 신면리에서 출생했으며, 무계(巫系)에 속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판소리 명창 전도성의 친척인 줄광대 전학술과는 이종간이다. 그는 당대의 장구귀신으로 명성이 자자하던 장고 명인 김홍집의 친형이며, 쇠잽이 김광래의 스승이기도 하다.

전학술은 바로 이봉문에게 장구를 가르쳤던 전재성의 아버지이다. 당시에는 굿으로 먹고 살아야 했던 당골들은 절대 양인에게는 농악을 가르치지 않았는데, 이 불문율을 깨고 전재성은 이봉문에게 농악을 가르쳤던 것이다. 이외에도 김도삼 역시 양인 신분이다.

김홍술은 사당패를 조직하여 전국을 순회하기도 했으며, 당대 제일의 쇠잽이로 회자되고 있었고, 특히 부포놀음에 뛰어났다고 전한다.

김바우는 1896년께 부안군 보안면 우동리 원우동마을에서 태어났다고 전해지며, 김판바우, 혹은 김판암 등으로 불렸다고 한다. 그는 무계 출신으로 쇠가락과 윗놀음에 매우 능했다고 전한다.

김도삼의 농악 기예는 김제군 부량면의 상쇠 현판쇠와 정읍군의 전사종, 김광래, 전이섭, 김제군 백구면의 김문달 등의 상쇠들에게 계승되었다. 1945년 이후 김제와 정읍을 중심으로 한 정읍농악단이 왕성하게 활동했으나, 유명한 농악인들이 작고하거나 이주하여 정읍농악단은 쇠퇴하게 된다. 그 후 김제의 백구농악단이 그 뒤를 이어 활동하게 되었으나 여성농악단이 대중의 인기를 끌기 시작하면서, 남자 중심의 전문적인 농악단은 쇠퇴하게 된다.

유지화 관장이 정읍우도농악 명맥 이어

유지화 관장
유지화 관장

현재 정읍우도농악전수관에는 당시 여성농악단을 이끌었던 김도삼의 제자인 유지화 씨가 정읍우도농악전수관을 열어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유지화 관장은 1957년 집 앞에 남사당패가 공연하는 것을 보고 신들린 듯 따라나섰는데, 그 길로 평생 농악을 하게 되어 전국 방방곡곡을 안 다닌 곳이 없을 정도로 떠돌아 다녔다고 한다.

이때 그 사당패의 꼭두쇠가 전재성이었고 상쇠로 김도삼도 함께 하고 있었는데, 그야말로 농익은 명인들의 집합이었다. 여기서 유 관장은 김도삼에게 쇠를 전수받았고, 나아가 전재성에게서도 진법 등 정읍우도농악-보다 정확한 표현을 빌리자면 보천교의 차천자를 모시는 취타대의 농악-을 전수받았다고 한다.

유지화 씨가 정읍에 자리 잡기 전에는 정읍우도농악의 전체 규모를 제대로 실전에 적용해 기량을 펼치는 사람이 없었다. 이후 유지화 씨가 진법을 포함한 각 기명의 기량을 제대로 가르침으로써 비로소 정읍우도농악이 오늘에 이를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럼 정읍우도농악은 어디에서 나왔을까?

정읍농악의 역사는 멀리는 마한시대 때 정읍 지역에 자리했던 고대국가 초산도비리국과 고비리국의 오월제와 시월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고려사高麗史』 「악지樂志」에는 <정읍사(井邑詞)> 악곡에 맞추어 장고를 치며 부르는 ‘무고(舞鼓)’, 곧 장고춤이 보이기도 하고, 조선시대 후기 정읍에서 일어난 동학농민혁명에서 동학군을 훈련시키는 데 농악을 활용한 기록도 보인다. 1차 고부봉기 때 말목장터에서 고부관아까지 가는 동안 전광문이란 인물이 태평소를 불며 취타대를 이끌었다고 한다.

1894년 1월 10일 밤, 배들평(梨坪) 말목장터에는 머리에 수건을 동이고 손과 손에 농기구와 죽창을 든 농민들이 모여들어 갑오농민 제1차 봉기가 시작되었다. 말목장터는 부안, 태인, 정읍으로 향하는 길이 교차하는 삼거리에 있어서 사람들이 모이기 좋은 곳이었고, 전봉준의 집이 있는 조소마을에서 좀 떨어진 곳에 있었다. 20여 리 떨어진 고부관아까지 가는 동안, 지나치는 마을마다에서 농민들이 합류하여 사람들의 수는 점점 더 불어났는데, 이때 당골들이 중심이 되어 길군악, 곧 길굿을 쳤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처럼 동학농민혁명 당시에는 길굿을 쳐서 사람들을 모았고, 행군할 때나 전투 중에도 길굿을 쳤다고 전한다.

이처럼 앞으로도 자주 전씨 성의 단골이나 삼현육각의 명인들, 그리고 풍물의 명인들이 아주 많이 나오는데 이들 모두가 천안전씨로서 대대로 세습무계로 알려져 있다.

일제강점기에는 정읍 보천교에서 농악을 종교음악으로 사용

일제강점기에는 정읍 보천교에서 농악을 종교음악으로 사용하면서 전국 농악 명인들이 정읍으로 모여들어, 정읍농악이 근대화하는 기초가 되었다.

1920년 당시 보천교는 전국의 신도를 60방주(方主)의 조직으로 묶고, 55만 7,700명에 달하는 간부를 임명하기도 하였다. 당시 일제는 보천교의 신도를 600만 명이라 보고하고 있었다. 1921년 차경석은 대규모의 천제(天祭)를 올리고 국호를 <시국(時國)>, 교명을 <보화(普化):뒤에 보천교라 함>로 선포하였다. 이때부터 교단 안팎에서는 차경석이 천자로 등극할 것이라는 소문이 크게 떠돌았고, 민간에서는 차경석을 차천자(車天子)라 불렀다.

이에 보천교는 1922년 황제의 궁궐을 건축하여 십일전(十一殿, 일제 때 이를 뜯어 오늘날 조계사 대웅전이 됨)이라 하고, 궁중음악 동동, 수제천(정읍사)을 기본으로 100명이 공연하는 대형농악대를 조직하였다. 이때부터 차천자란 이름이 보편화된 것 같은데, 사실 지금도 정읍농악 전수자들이나 원로들은 여전히 차경석을 말할 때 차천자라 부르고 있다.

실제 필자가 앞서 언급한 유지화 관장에게서 구술을 받았는데, 시종일관 차경석을 여전히 차천자라 불렀다.

이러한 농악은 고려를 이어 조선에서도 궁중아악과 더불어 각 지방마다 재인청을 두어 교화의 수단으로 삼았다고 한다.

특히 소학과 향약을 시행하기 전인 16세기 후반까지는 도교를 숭상하는 소격서가 지방마다 설치되어 천제를 지내고 있었기 때문에 단골들의 활동이 매우 왕성했다고 한다.

재인청 통해 우리나라의 예술성 높은 민속전통예술이 계승⋅발전

이를 국가에서 체계적으로 양성하고 관리하던 곳을 재인청이라 한다. 재인청이란 조선 말기까지 지방에서 활동하였던 직업적인 민간 연예인의 연예활동을 행정적으로 관장하였던 곳을 말하고 다른 한 편 광대청, 장악청, 신청, 풍류방, 공인청이라고도 하였다. 그리고 이들 재인청은 경기도, 충청도, 전라도의 각 군에 두었는데 총수인 대방과 그 아래 각도의 책임자인 좌우도산주, 그리고 그로부터 행정적인 지시를 받는 각 군 소재 재인청의 우두머리인 청수로 구성되었다.

재인청이 주목받고 있는 것은 재인청을 통하여 우리나라의 예술성 높은 민속전통예술이 계승 발전되어져 왔을 뿐만 아니라 종교와 철학과 예술을 모두 융합하는 축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또 그것이 바로 우리의 역사이자 우리 문화의 전통적 뿌리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재인청 소속 광대 집단의 주된 임무는 중국에서 사신이 온다거나 나라의 큰 경사가 있을 때 서울에 모여 산대희(山臺戱)를 하는 것이었고, 평상시에는 소속 지방 관아에서 악기 등을 연주하며 생계를 꾸려나갔다.

우리나라에서 공연 예술을 담당한 주요 집단은 광대, 악공, 기생 등으로 기생 집단은 관청에 전적으로 매여 있어 그 활동이 자유롭지 못했지만, 광대 집단은 유사시에만 관청에 동원되고 평소에는 민간에서 자신들의 예술 활동을 자유로이 할 수 있었기에 우리나라 공연 예술사에 있어 광대 집단이 그 중심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광대 집단이 담당한 예술은 각종 소리, 줄타기나 땅재주 같은 기예, 민속춤, 각종 기악 연주, 전문적 농악 등 우리나라 공연 예술들 중 주요한 대부분의 종목들이 망라되어 있었기 때문에 광대 집단이야말로 우리나라 공연 예술사의 중심 집단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광대 집단이야말로 우리나라 공연 예술사의 중심 집단

한편, 이들 광대 집단은 전통 사회에서 하나의 특수 신분 집단이었기에 1836년께에는 경기도에만 하더라도 4만여 명에 이를 정도였다고 한다. 이들은 신분제도가 철폐된 1894년 갑오경장 때 ‘창우’ 곧 ‘광대’ 신분에서 공식적으로 풀려날 수 있었으나, 그 후에도 상당수의 후손들은 여전히 과거 광대 집단이 담당한 여러 예능 분야에서 활동했다.

조선말기와 한말, 그리고 1900년대에 들어와 재인청은 사라지고 신분제에서 벗어난 새로운 형태의 예능집단이 나타나는데 정읍의 입암면 대흥리에 보천교가 들어서면서 정읍우도농악이 탄생한 것이다

특히 전봉준의 동학농민봉기로 인하여 멸문지화를 당할 뻔했던 천안전씨들은 단골과 광대 재인 등의 영역에서 발군의 기량을 보이게 된다. 물론 전주의 재인청을 통해 갈고 닦은 실력이 바탕이 되었다.

천안전씨의 세습무계 가운데 최근 죽은 전금순의 구술과 전금순 가계를 조사한 이영금 교수의 보고서를 보면 천안전씨를 중심으로 한 단골과 광대 농악 명인들의 활동을 자세히 파악할 수 있다.

조선 후기에 판소리 광대에게 벼슬이 내려지고 국창으로 활동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면서부터 재인들은 우선적으로 판소리 광대로의 진출을 모색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정읍 단골인 전금순의 친정무계를 통해 파악된 판소리 명창으로는 전학술⋅전명준⋅전도성 등과 전금순의 외할머니 친정 집안인 신관옥⋅신관봉⋅신영채 등이 있다. 이 가운데 전도성은 ‘판소리 5명창’ 중 한 사람으로 널리 이름이 알려진 인물이다. 그는 그의 아버지인 전명준에게서 판소리를 배웠는데, 훗날 ‘어전 명창’으로서 고종황제로부터 참봉 벼슬까지 받았다고 한다.

판소리 명창인 신영채는 끝을 탁 끊어내는 ‘이슬털이목’을 잘 했을 뿐만 아니라 ‘귀곡성’과 ‘아롱성’은 신기(神氣)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평을 들었다고 전한다.

재인청에 소속되어 활동했던 삼현육각 잽이들은 지방관아의 연례⋅사가(私家)의 연향(宴享)⋅향토신사(鄕土神祀) 등의 행사에 참여했을 뿐만 아니라 사찰⋅초례청⋅제각⋅사정(射亭)⋅승무 등의 의식에도 초청되어 연주활동을 벌이기도 했다. 또한 이들은 부잣집의 회갑이나 진갑 잔치 때 초청에 되어 기량을 맘껏 펼쳐 보이기도 했다. 전금순의 친정 집안과 연계되었던 삼현육각의 대가로는 전기환⋅전계문⋅전추산⋅신관용⋅신달용 등이 있었다. 전기환은 피리의 대가였으며, 전기환과 형제지간인 전계문은 대금⋅정악⋅양금⋅가야금⋅거문고 등에서 당대 최고의 수준을 자랑하였다고 한다.

전추산은 ‘단소 산조’의 창시자이며, 정읍을 중심으로 한 ‘향제 풍류’의 중시조라고 할 수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신관용 또한 매우 탁월한 연주 솜씨를 자랑하였는데, 풍류와 산조의 대가인 이영채로부터 가야금 풍류와 가야금 산조를 배웠다고 한다. 전계문에게서 대금⋅가곡⋅풍류 등을 배우고 전추산에게서 대금 산조를 배운 신달용은 풍류와 산조에 두루 능통했는데, 그는 특히 정읍의 향제 줄풍류 단체인 ‘초산율계’의 창립 계원으로 참여하여 중추적인 활동을 보여주었다고 한다.

또한 타악기에 재능이 있는 재인들은 농악전문예능집단에 소속되어 활발한 예능 활동을 펼쳐 보이기도 했다. 예를 들어 정읍농악단에 소속되어 예능 활동을 보였던 재인들로는 김광래(정읍, 쇠잽이), 전이섭(정읍, 쇠잽이), 전사종(정읍, 쇠잽이), 전사섭(정읍, 쇠잽이), 신두억(정읍, 쇠잽이), 김홍집(정읍, 쇠잽이), 신기성(정읍, 장구잽이), 신기남(정읍, 장구잽이), 전재성(정읍, 대포수ㆍ창부) 등이 있다. 이들은 모두 전금순의 친정 집안과 관련된 세습무계 출신으로 호남우도 풍물굿의 정립과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이처럼 굿의 원형과 분화의 양상에 이견이 존재한다 하더라도, 풍물굿이 굿의 독립적인 표현 형식으로 변화되어온 과정에서 단골 집단이 미친 영향은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오늘날 설장구춤은 정읍우도농악에서 비롯

박세향 설장고 이수자
박세향 설장고 수료자

각설하고 필자가 이렇게 장황하게 장광설을 푸는 이유는 바로 설장구춤과 설장고에 있다.

판굿에서 장구잽이가 나와서 설놀음을 펼치는데, 이를 개인놀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처음에는 상쇠가 장고를 끌고 나와서 놀이를 하다가 이윽고 흥이 나기 시작하면 그때 비로소 농악이 시작되는 것으로 이번 민주가족합동세배에서 식전공연에 해당하는 것과 마찬가지인 셈이다.

오늘날 전승되는 설장구춤은 정읍우도농악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장구잽이들끼리 미지기, 제자리 뛰기, 바꿈질, 삼진삼퇴, 옆걸음치기, 연풍대, 굿거리, 덩덕궁이, 세산조시 등 여러 가락을 치던 것을 김홍집이 혼자 나와 발림을 하며 구정놀이, 굿거리, 덩덕궁이, 세산조시, 동살풀이, 후두둑가락 등 장구잽이가 펼칠 수 있는 모든 기교를 구사하게끔 구성했다. 설장구의 매도지라는 맺이가락은 정읍의 이봉문 설장구에 의해 다듬어졌다고 한다.

최화집, 김만식, 김오채, 김동언, 박세향 등으로 이어지는 설장고는 저멀리 삼국시대부터 조선말기에 이르는 우리 농악이 갑오년 동학농민혁명과 보천교의 차천자 취타대를 거쳐 새롭게 다듬어진 정읍우도농악의 진수를 담고 있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화려하고 장엄한 정읍우도농악의 꽃 중의 꽃, 신분제를 벗어나 연희 기량을 맘껏 펼쳐 보인 농악 예술의 총화가 바로 이 박세향 총무가 선보인 설장고인 것이다. 끝으로 이 설장고를 차분히 감상해 볼 기회를 가져보길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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