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 스트레스
약속 스트레스
  • 문틈 시인
  • 승인 2019.02.07 0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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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와 약속을 하면 그때부터 나는 스트레스를 받는다. 약속 날짜를 잊어먹지 않고 지켜야 한다는 심리적 압박감이 약속 날짜 전의 여러 날들은 물론 약속 당일의 시각까지 이어진다. 약속 당일 그날 하루는 온통 약속 말고는 다른 생각을 못할 정도다.

가령 오전 열한 시에 약속이 잡혀 있다고 하면 나는 벌써 아침 아홉시부터 서두르기 시작한다. 약속 장소에 가기 위해 열시쯤부터 행차 준비를 해도 되련만 불안감이 들어서 어쩔 줄 모른다.

샤워를 하고 면도를 하고 옷을 차려 입고 필요한 것을 준비하고 무슨 예식에 나가는 것처럼 부산을 떤다. 그러다보면 아홉시 반이 가깝다. 마을버스를 타고, 전철을 타고 이윽고 약속 장소에 도착한다.

흔히 약속 시간보다 40분이나마 더 일찍 당도하기 일쑤다. 그러고는 슬며시 나 자신에 대한 짜증이 난다. 대체 왜 나는 약속 시간 앓이를 하는 것일까. 약속 시간인 열한 시 부근에 오면 안된단 말인가. 아니, 열한 시 넘어서 오면 큰일이라도 난단 말인가.

너무 일찍 도착한 바람에 뻘쭘해진 나는 그 장소 주위를 어슬렁거리나 카페에 들어가서 약속한 사람이 올 때까지 죽치고 기다린다. 대체 약속을 할 때마다 번번이 이 짓에 화가 날 정도다. 그래서 되도록이면 약속을 안하려는 편이다.

약속 앓이는 어릴 적부터 생긴 고질병이다. 멀리 있는 학교를 걸어서 가던 시절 나는 학급에서 늘 가장 먼저 교실에 도착하는 학생이었다. 학교 가까이 사는 아이들은 수업 시간에 딱 맞추어 오거나 조금 늦게 온다. 가장 멀리 사는 나는 가장 먼저 온다.

그때부터 나 자신의 이런 행태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무엇인가 잘못된 것 같은 느낌을 가졌다. 이 무엇인가 잘못된 것 같은 습관이 평생토록 나를 성가시게 한다.

엊그제만 해도 지인과의 약속 장소에 무려 한 시간도 더 전에 나갔다. 중요한 약속도 아니다. 오랜만에 지인을 만나 점심을 함께 하자는 약속이다. 내가 약속 스트레스를 덜 받으려면 아침 아홉시에 약속을 하는 것이 가장 편하다.

그런데 어느 누가 그렇게 이른 시간에 약속을 할 사람이 있을까. 아침을 먹고부터 짧은 시간 내에 약속을 잡으면 나는 곧바로 나가면 되니 스트레스를 거의 받지 않는다. 아침이나 점심시간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약속 시간을 내가 꺼려하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그렇게 왕창 스트레스를 안고 약속 장소에 나가면 약속 상대는 느긋이 나타난다. 그럴 때마다 나는 상대가 원망스러운 것이 아니라 나는 왜 저처럼 못할까, 하고 나를 속으로 구박한다.

요즘 사람들은 약속 시간을 두고 나처럼 구애받지 않는 것 같다. 약속 시간에 늦을 것 같으면 휴대폰으로 “여기 어딘데요. 차가 밀려서 늦겠는데요.” 실시간으로 중계하면 그만이다. 또 “일이 생겨 오늘 약속 못 지키겠는데요.” 하면 역시 끝이다. 편하게들 산다.

나는 죽어도 그렇게 하지 못한다. 약속을 해놓고 약속날짜에 임박해서 휴대폰으로 늦는다, 혹은 약속을 지킬 수 없게 됐다, 라고 하는 것은 내 사전에는 없는 말이다. 내가 혹시 약속이란 것에 대해서 너무 신성하게 생각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약속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전인격을 건 신의의 원칙에 기반을 둔 행위다. 약속을 잘 지키지 않는 사람은 미덥지 않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판단한다.

옛날 독립운동가 한 분이 중국 만주에서 친구 집에 숨어 들었다가 그 집 어린 딸이 며칠 후 자기 생일인데 그날 아저씨가 와 축하해주면 좋겠다고 해서 그러마고 약속을 했는데 그 약속을 지키려 일경에 쫓기면서도 갔다가 체포된 일화가 있다.

이 경우는 좀 지나친 측면이 있다고도 볼 수 있지만 약속은 일종의 불문율이다. 인간이 영특한 것은 약속을 잡고 그것을 지키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달이 바다와 한 약속은 수천 년, 수만 년 어김없이 지킨다. 조금, 사리의 정확한 때를 보라. 사람끼리의 소통이란 것도 실은 약속을 지키는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자기 자신과의 약속, 타인과의 약속, 신과의 약속이 지켜질 때 세상은 살만한 곳이 될 것이다. 아무리 사소한 약속이라도 그것이 지켜질 때 우리는 세상사는 재미를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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