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기행(2) 메이지 신궁에서①
도쿄기행(2) 메이지 신궁에서①
  • 김세곤 역사칼럼니스트
  • 승인 2019.01.14 09:0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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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2일, 도쿄 여행 2일째이다. 일찍 호텔을 나섰다. 오전에 야스쿠니 신사, 와세다대학교를 답사했다. 오후에 도고 신사를 본 다음 메이지 신궁으로 갔다. 그런데 하라주쿠 역 근처는 인산인해이다.

하라주쿠 역 근처

메이지 신궁 입구에 도착했다. 일본의 신사가 다 그렇듯이 입구에 도리이(鳥居)가 있다. 도리이는 우리나라의 솟대나 홍살문과 비슷하다. 그런데 도리이 위에는 금박의 국화가 세 개 있다.

메이지 신궁 입구 도리이

국화를 보니 국화빵이 생각난다. 『국화와 칼』이라는 책도 생각난다. 『국화와 칼』은 미국의 여성 인류학자 루스 베네딕트가 1946년에 출간한 일본문화의 유형을 밝힌 책이다.1)

그러면 국화와 칼은 무엇인가? 흔히들 국화(菊花)는 평화이고 칼은 전쟁을 상징한다고 해석한다. 필자가 보기는 국화는 황실이고, 칼은 사무라이이다. 즉 천황제와 군국주의이다.

일본 황실의 문장(紋章)은 국화이다. 일본의 국화(國花)도 벚꽃이 아니라 국화이다.

또한 일본은 천황의 나라이다. 헌법 제1조를 보자.

천황은 일본국의 상징으로 일본국민통합의 상징이며, 이 지위는, 주권이 존재하는 일본 국민의 총의(總意)에 기초한다.

이는 미군정 치하인 1946년 11월에 만들어진 ‘평화헌법’ 조문이다.

일본은 1889년에 ‘대일본제국헌법(일명 메이지 헌법)’을 제정하였는데 이토 히로부미가 헌법 초안을 만들었다.

그러면 ’메이지 헌법‘ 제1조와 제3조를 보자.

제1조 대일본제국은 만세일계(萬歲一系)의 천황이 통치한다.

제3조 천황은 신성하여 침범할 수 없다.

일본은 태양신의 후손 천황이 통치하고 천황은 ‘살아있는 신’이라는 의미이다. 즉 신도(神道)의 나라, 제정일치의 나라 일본을 천명하고 있다.

이와 함께 일본은 사무라이의 나라이다. 2003년에 귀화한 일본인 호사카 유지는 『조선선비와 일본 사무라이』에서 한국과 일본의 정신을 ‘붓과 칼’로 보았다.

도쿄국립박물관에 전시된 ‘칼’

메이지신궁은 메이지 천황과 쇼켄 황태후를 제신(祭神)으로 하여 1920년에 세워졌다. 당시에 일본 군국주의의 괴벨스 도쿠토미 소호는 『고쿠민신문(國民新聞)』에 아래 글을 실었다.

“이제는 메이지 천황이 유신중흥의 대정(大政)을 펼치신 도쿄에 메이지신궁이 건립되어 메이지 천황의 신령(神靈)이 봉안된다. 실로 이것은 일본 국민에게는 수도에, 도쿄 시민에게는 시중(市中)에 황실중심주의의 중심점을 부식(扶植)해 놓는 것이다. (중략) 장차 메이지신궁이 우리 일본 국민의 황실중심주의의 본원(本元)으로 되고, 이로써 세계 만국 모두 우리 국체(國體)의 아름다움을 칭송할 수 있게 되길 깊이 바라는 바다.”

메이지 천황(1852~1912, 재위 1867~1912)은 메이지 유신을 단행하여 일본의 근대화를 이룬 천황이다. 그는 1867년 1월 30일에 고메이 천황이 갑자기 서거하자 15세에 122대 천황이 되었다.2)

1853년에 미국 페리 제독은 4척의 흑선을 이끌고 개항을 요구했다. 일본은 1854년에 미·일 화친 조약, 1858년에 미·일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였다. 그런데 개항 이후 외국상품의 수입으로 경제가 타격을 받자 생활이 어렵게 된 하급 무사를 중심으로 양이(洋夷)운동이 일어났다. 여기에 무능을 드러낸 막부 체제를 무너뜨리고 왕정을 회복시키려는 존왕(尊王)운동도 일어났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사츠마번과 조슈번은 삿조(薩長)동맹을 체결하여 막부에 대항했다. 결국 막부는 존왕양이 세력에 굴복하여 1867년 11월 9일 메이지 천황에게 대정봉환(大政奉還)함으로서 260년간 유지되어 온 에도막부(1603~1867)는 막을 내리고 왕정복고가 실현되었다.

메이지 천황은 1868년 4월에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을 단행했다. 입헌 군주제, 중앙집권제, 징병제도, 교육개혁, 상공업 장려 등을 통해 일본의 근대화를 이루었다.

이어서 일본은 1876년에 조선을 개항시키고, 청일전쟁·러일전쟁에서 승리하여 1910년에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어 제국주의 발판을 마련했다.

일본인들은 지금도 메이지 천황을 ‘근대화를 이룩한 천황’으로 추앙하고 있다. 우리에게는 막심한 고통을 주었지만.

1) 태평양 전쟁이 한창이던 1944년 6월 전세(戰勢)는 미국에 기울었다. 미국 국무부는 일본 항복 후 통치를 준비했다. 그래서 일본 문화의 틀에 대한 집필을 베네딕트에게 의뢰하였다.

2) 1909년 10월 26일에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안중근 의사는 이토를 죽여야 하는 15개 죄목 중 15번째 항목으로 “고메이 천황을 죽인 죄”를 언급했다.(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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