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전화번호
옛날 전화번호
  • 문틈 시인
  • 승인 2018.12.18 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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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휴대폰 전화번호는 018로 시작하는 옛날 번호다. 전화기도 케케묵은 폴더폰 구식이다. 요새 이런 전화번호를 가진 사람은 드물다. 그러나 통화, 문자 기능이 멀쩡해서 요즘 사람들이 쓰는 비싼 스마트폰을 마다하고 굳이 이 전화번호를 사용하고 있다. 지하철이나 지하에서는 통화가 되지 않아 이제 스마트폰으로 바꿀 때가 되지 않았느냐고 권하는 사람들도 있다.

나는 무엇이든지 한번 사용하면 그 물건이 닳아져서 아주 못쓰게 될 형편이 아니라면 새것으로 개비하지 않는다. 워낙 타고난 성격이 그렇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변화를 싫어한다고 생각하면 오해다. 누구보다도 사고방식에서 진보적이라고 믿는다. 어쨌든 휴대폰은 이제 신체의 장기와도 같이 취급되는 물건이긴 하지만 더 좋은 휴대폰을 준다고 해도 전혀 바꿀 생각이 없다. 사람들이 날 딱하게 생각할 법도 하다.

은행에 새로 계좌를 트거나 병원, 공공기관에 가면 서류 작성을 할 때 휴대폰 번호를 묻는 경우가 있는데 상대는 일단 010을 써놓고는 내 휴대폰 번호를 적으려고 한다. 018부터 불러주면 아직도 이런 번호가 있어요?’ 하고 의아해한다. 그럴 때면 이상하게도 나는 뭐랄까, 일종의 괘감 같은 것을 느낀다. 아직도 이런 번호가 살아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많다.

내 전화번호를 알고는 사람들은 흡사 내가 먼 과거에서 미래로 온 시간이동자처럼 낯설게 본다. 그럴 때 한 마디 해준다. “과거가 현재 속에 있다는 걸 잊어먹지 마시오.” 스마트폰을 사용하면 사람들과 수시로 단톡방 같은 데서 연결이 되고, 사진을 공유하고, 동정을 살피는데 아주 좋단다. 그런데 왜 나는 한사코 옛 전화번호를 고집부리는 걸까.

나는 사람들에게 집단 유행하는 것들을 생래적으로 거부하는 듯하다. 무리지어 무조건 일치단결하는 걸 싫어한다. 한 마음 한 뜻을 주장하는 것까지도 썩 내키지 않는 때가 있다. 남과 다른 사고, 생활, 언어를 선호한다. 이게 뭐 그렇게도 잘못된 것일까. 나는 늘 나이고 싶은 것이다.

그러다 보니 고집이 현실을 이기지 못할 때가 무척 많다. 지난 해 친한 친구의 모친이 별세했다는 부고 전화 메시지를 이튿날에야 받아서 자칫 큰 실수를 저지를 뻔했다. 부랴부랴 천릿길을 문상가느라 삼복더위에 고생께나 했다. 알고 봤더니 휴대폰에 문자 메시지가 가득 차 있는 바람에 내게로 온 급한 문자 메시지가 전화기 주변에서 들어오려고 맴돌고 있었던 것. 즉시 수신이 안되었던 이유다. 그 후로는 문자 메시지가 뜨면 보고나서 얼른 비운다.

엊그제는 한 고향 출신들끼리 모이는 송년회 소식이 오지 않아 전화를 걸었더니 벌써 전에 단톡방에 다 올려놓았는데요.” 한다. 구식 휴대폰 가지고는 단톡방과 연결이 안되어 사회생활이 심히 불편하다는 것을 실감한 순간이었다. 하마터면 송년회에 불참할 뻔했다. 휴대폰 전화기를 스마트폰으로 바꾸려고 통신사에 물어보았더니 그럴 경우 전화번호도 바꾸어야 한다고 한다. 이 구식 전화기는 아무래도 못쓰게 될 때까지 계속 써야 할 판이다.

얼마 전 십년도 더 전에 미국으로 이민 간 옛 지인한테서 전화가 왔다. “저예요. 아직도 옛날 전화번호 그대로네요.” 먼 과거로부터 온 그리운 목소리였다. “(you)한테서 전화가 올지 몰라 전화번호를 여태 바꾸지 않았어.” 나도 모르게 그렇게 대답이 나왔다. 아마도 내 마음 속에는 그런 뜻이 숨어 있었던가 보다. 우리는 한참을 말없이 그대로 있었다. 가슴 뭉클한 순간이었다.

내가 전화번호를 안 바꾼 진짜 이유는 어쩌면 이처럼 소중한 과거를 잊지 않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도 든다. 나는 과거와 소통하는 것을 귀하게 여긴다. 이태리 로마 역에서는 8번 버스가 50년도 더 넘게 그 번호를 단 채 변함없이 같은 노선을 운행한다고 한다. 그 버스에 서린 추억을 언제든 재경험할 수 있다.

자고나면 오른쪽이 왼쪽으로 바뀌는 환경에 살다보니 나는 자주 길을 잃는다. 새것도 좋지만 과거도 좋다. 과거를 무조건 타도하는 집단이나 시류에 편승하지 않고 고집을 지키는 데서 나는 존재감을 느낀다. 거친 세상살이에도 이렇듯 나만의 소소한 기쁨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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