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의 한 가운데서
가을의 한 가운데서
  • 문틈 시인
  • 승인 2018.11.07 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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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은 지금 가을의 한 가운데 와 있다. 나는 단풍이 한창인 가을 속으로 막 들어선다. 이 산 저 산에 모든 나뭇잎들이 색색으로 곱게 물들어 있다. 그야말로 단풍 잔치다. 가을 단풍은 자연이 펼쳐 보인 두 번째 꽃철이라 해도 될 성부르다. 봄에 피는 꽃, 가을에 지는 낙엽. 나무들마다에서 낙엽들이 소소히 지는 모습은 흡사 꽃잎들이 휘날리는 듯하다.

가을 단풍이 든 나무들 중에서 노란 색으로 물든 은행나무가 단연 돋보인다. 맑고 투명한 노오란 은행잎들이 나뭇가지에 매달려 일제히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은 마치 신라 금관에 달린 금빛 수엽들 같다. 수많은 은행나무 잎새들이 수북히 떨어져 있는 길바닥은 멧방석을 깔아놓은 듯하고.

가을 속에 우뚝 서서 존재감을 한껏 드러내는 은행나무는 희귀종으로 분류되어 있다. 자칫 멸종하기 쉬운 나무라는 뜻이다. 길가에 선 은행나무들이지만 사람이 가꾸어주지 않으면 제 힘으로는 후손을 보기 힘들다. 늘 관리하고 보살펴 주어야 한다. 사람의 손길을 받아야만 살아가는 귀한 나무다. 그래서 야산에는 은행나무가 거의 없다.

좀 과장해서 말한다면 가을에는 은행나무와 기타 나무들이 있을 따름이다. 봄, 여름에는 다른 나무들처럼 초록에 섞여 잘 눈에 뜨이지 않다가 가을 낙엽철이 되면 단연 그 모습이 압권이다. 그 곱고 깔끔한 금빛 색, 바람에 우수수 꽃보라처럼 흩날리는 풍경, 낙엽끼리 수북이 쌓여 있는 모습, 그리고 잎새의 섬세한 디자인은 금 세공사가 공들여 새긴 양 독특한 미를 보여준다.

나는 낙엽을 한 잎 주워서 한참을 들여다본다. 지난 봄과 여름, 저 먼 날의 내력이 아로새겨진 작은 잎. 은행나무 낙엽들은 빗자루로 쓸어버리기에는 좀 아깝다는 생각이 든다. 함부로 밞고 지나기에도 좀 망설여진다. 바닥에 떨어진 은행나무 낙엽들이 바람에 쏠려가는 모습은 또 얼마나 마음을 흔드는가.

목가 시인 신석정은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라는 시에서 ‘서리 까마귀 높이 날아 산국화 더욱 곱고/노오란 은행잎이 한들한들 푸른 하늘에 날리는/가을이면 어머니! 그 먼 나라에서//양지밭 과수원에 꿀벌이 잉잉거릴 때/나와 함께 그 새빨간 능금을 또옥 또옥 따지 않으렵니까’하고 노래한다. 천지가 가을빛으로 물든 이 계절은 참말로 시인의 노래대로 ‘그 먼 나라’에 와 있는 것만 같다.

노란 은행잎을 책갈피에 꽂아두고 오래도록 가을을 기억하고, 봉투에 은행잎을 몇 잎 넣어 그리운 이에게 편지글 대신 부친 젊은 날 어느 가을의 추억이 있다. 가을 은행나무는 그때도 지금도 추억의 나무다.

마을 길에 환영나온 무리처럼 양 길가에 늘어서 노란 은행잎으로 치장하고 위엄을 뽐내는 은행나무는 주민들에게 가을을 선언한다. 그래서 은행나무가 없는 가을은 상상하기 어렵다. 이 나라의 가을은 오직 아름다운 은행나무를 내세우려고 단풍이 드는 것 같다.

은행나무는 1억2천만 전에 태어난 나무라 한다. 지구 나무들 중에 가장 먼저 출생한 나무 그룹에 속한다. 현생 인류가 8만년 전에 출현했다고 하니 비견할 바가 못된다. 그렇게 까마득한 날, 인간이 살지 않았던 시기에도 지구에 가을이 있었을까. 아마 그때도 지금처럼 노랗게 물들어 은행나무는 가을빛을 뿜어냈을 것이다. 자기를 보아줄 인간의 출현을 기다리면서 말이다.

그토록 오래 살아온 은행나무는 해충이나 벌레도 타지 않는다. 잎새에 방어 화학물질을 간직하고 있어 범하지 못한다. 그런가 하면 이로운 물질을 품고 있어 약품의 원료로도 쓰인다. 사람과 친한 나무, 게다가 그만큼의 화려한 모습과 미를 갖춘 나무를 나는 다른 나무에서 찾지 못한다. 가을 산사에 가면 떨어진 은행나무잎들이 절집 온 마당을 뒤덮고 있는 풍경이 숨을 막히게 한다. 불경을 펼쳐 보인 느낌이다. 노승은 은행나무 낙엽 한 잎 한 잎에서 대자연의 설법을 읽어내고는 가만히 쓸어낸다.

얼마 전에 서울시에선가 은행나무 가로수 중 암컷 나무들을 싹둑 베어버리기로 했다는 뉴스를 본 일이 있다. 은행나무 열매가 떨어져 악취를 내기 때문에 시민들이 싫어한다나. 길바닥에서 은행을 함부로 주워가면 벌금을 물린다고 하다가 이제는 암나무를 베어버린다니 어찌 자연을 그리 모를까. 모르긴 해도 세상 이치가 음양으로 되어 있고 보면 암나무가 있어야 숫나무들이 쑥쑥 자랄 법한데.

바람이 건듯 불자 떨어져 쌓인 노란 은행잎들이 길바닥을 나비처럼 날아오른다. 낙엽이 된 은행잎들은 다 어디로 가는 것일까. 낙엽들은 함께 모여 있다가 함께 어디론가 가는가 보다. 이런 생각을 하다가 갑자기 가슴을 저며오는 가을의 쓸쓸함에 젖어들었다.

나는 은행나무로부터 의연함을 더 배워야만 한다. 아, 가을은 저렇게 은행나무가 아름답다고 소리쳐 외치고 있다. 은행나무 잎을 주워 든 채 저물어가는 풍경 속에 찬 바람 옷깃을 여미고 한참을 가을의 한 가운데 나는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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