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와 이토 히로부미와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공통점은?
박정희와 이토 히로부미와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공통점은?
  • 김세곤 역사칼럼니스트
  • 승인 2018.10.29 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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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곤 역사칼럼니스트
김세곤 역사칼럼니스트

박정희(1917~1979) 대통령, 이토 히로부미(1841~1909), 니코스 카잔차키스(1883~1957)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박정희 대통령은 굳이 설명 안 해도 알 것이고, 이토 히로부미는 1905년 11월 18일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시킨 조선침략의 원흉이고 동양평화의 교란자이다.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그리스인 조르바’의 작가이다. ‘그리스인 조르바’는 영화로도 만들어졌는데 안소니 퀸의 춤은 명연기였다.

세 사람의 국적이 한국, 일본, 그리스이어서 공통점 찾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공통점은 ‘사망일이 10월 26일’이라는 점이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은 KBS 당진 송신소 개소식과 삽교천 방조제 준공식에 참석한 후, 서울 궁정동 안가에서 연회 도중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총에 맞아 서거했다. 그의 서거로 1961년 5.16 혁명이후 18년간의 집권은 막을 내렸다. 그렇지만 12.12 사태로 인해 민주화의 길은 멀고멀었다.

1909년 10월 26일 오전 9시 30분께 중국 하얼빈 역에서 총성이 울렸다. 안중근(1879~1910)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쏜 것이다. 오전 9시께 이토 히로부미를 태운 특별열차가 하얼빈 역에 멈췄다. 곧 러시아 재무대신 코코프체프가 열차에 올랐다. 약 25분간 대화를 나눈 뒤 이토는 코코프체프의 안내를 받으며 열차에서 내려 도열한 의장대를 사열하고 각국 사절단의 인사를 받기 시작했다.

이때 안중근 의사는 의장대 뒤에서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이토가 10여보 떨어진 지점에 이르렀을 때 안중근 의사는 탄환 7발을 장전한 브라우닝 권총을 꺼내들고 총을 쏘았다. 제1탄은 이토의 가슴에 명중되었고, 제2탄은 흉부를 맞췄다. 3탄이 복부를 관통하자 이토는 그 자리에서 고꾸라졌다.

안중근 의사는 저격 후 당황한 빛 없이 두 손을 높이 들고 ‘코레아 우라!’(‘대한국 만세’의 러시아어)를 세 번 외친 후 러시아 헌병에게 체포되었다. 총을 맞은 이토는 열차 내 객실로 옮겨져 응급조치를 받았으나 15분 만에 죽었다.

10월 30일에 안중근 의사는 일본 검찰관 미조부치 다카오에게 심문을 받았다. 미조부치가 이토를 죽인 이유를 묻자, 안중근 의사는 당당하게 명성황후를 시해한 죄, 고종황제를 폐위시킨 죄, 을사늑약과 정미7조약을 강제로 맺은 죄 등 15가지 이유를 댔다.

안 의사의 공판은 1910년 2월 7일부터 2월 14일까지 뤼순의 관동도독부 지방법원에서 단 6번으로 끝났다. 2월 14일에 마나베 재판장의 선고가 있었다. 재판장은 이 사건을 ‘이토 암살사건’이라 칭하고 안중근 의사를 흉한(兇漢 : 테러리스트)으로 몰아 일본 형법의 살인죄를 적용하여 사형을 언도했다. 그리고 1910년 3월 26일 안중근 의사의 사형이 뤼순감옥에서 집행되었다.

이토가 처단되자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 여러 나라는 안중근 의사를 영웅으로 추앙했다. 양계초는 ‘가을바람이 부니 이토 히로부미를 단죄하네.(秋風斷藤曲)’란 시를 지어 안중근 의사의 의거를 찬양했다.

손문도 안중근 의사와 이토 히로부미를 이렇게 평가했다.

 

공은 삼한을 덮고 이름은 만국을 떨치나니

백세의 삶은 아니나 죽어서 천추에 드리우네.

약한 나라 죄인이요, 강한 나라 재상이라

그래도 처지를 바꿔놓으니 이토도 죄인이라.

 

한편, 니체와 붓다와 조르바를 사랑한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자유로운 영혼이었다. 그는 소설 『최후의 유혹』에서 투쟁하는 인간에게 숭고한 귀감을 제시하고자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인간 예수를 그렸다.

그러나 예수가 아내를 거느린 것이 문제가 되어 1953년에 그리스 정교회는 출간을 막았고, 1954년에 로마 교황청은 금서 목록에 올렸다. 노벨문학상 후보에 두 번이나 오른 그는 1957년 10월 26일 독일에서 죽었다.

그런데 시신이 그리스 아테네에 운구 되자 그리스 정교회는 신성 모독을 이유로 아테네의 공동묘지에 안치를 거부하였다. 별 수 없이 그는 고향 크레타 섬에 묻혔다. 그의 묘에는 그가 생전에 미리 써놓은 묘비명이 쓸쓸히 그를 지키고 있다.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

 

10월 26일 뉴스를 검색했다. ‘안중근 의거 109주년’, ‘박정희 前 대통령 39주기 추모식, 구미시장은 불참’ 기사가 떴다. 카잔차키스는 그리스 사람이니 뉴스에 나올 리 없겠지만 크레타 섬은 꼭 가고 싶다. 자유로운 영혼과 마주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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