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한 물
고요한 물
  • 문틈 시인
  • 승인 2018.10.24 0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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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평생 정원사로서 수만 평의 정원에 온갖 화초와 꽃나무와 채소와 과일나무 들을 심고 젖소와 개, 닭, 고양이, 오리, 거위, 비둘기 들을 기르며 자연을 벗하고 연못의 고요한 물을 보며 행복을 누린 정원사가 있다. 그녀는 자기 말로 정원사라고 하지만 평생을 삽화가, 동화작가, 인형작가로 활기찬 활동을 하며 구순이 넘게 살았다.

그녀는 말한다. 내가 꾸민 정원은 천국이라고. 그러면서 “나는 ‘고요한 물’이라는 종교 창시자이다.”라고 자신의 삶을 찬양한다. 실상은 고요한 물 교(敎) 따위는 없다. 다만 그녀가 삶을 고요한 물처럼 마음의 안식을 누리고 사는 것이 인생의 답이라는 것을 깨닫고 이름한 생활 신조를 상징하는 말이다. ‘종교’ 의식으로는 1년에 한번 삶의 기쁨을 표현하기 위해 가족들이 정원의 집에 모여 집안에서 잔치를 할 뿐이다.

그녀는 말한다. “고요한 물 교의 신자들은 쾌락주의자들이다. 인생은 짓눌릴게 아니라 즐겨야 한다. 프라 지오반니(Fra Giovanni)는 이렇게 말했다. ‘세상의 우울함은 그림자에 지나지 않다. 그 뒤, 우리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 기쁨이 있다. 기쁨을 누리라.’ 바로 이것이 고요한 물 교의 첫 번째 계명이다. 기쁨은 누리라고 있는 것이다.” 얼마나 멋진 말인가.

내 생각컨대 이 사람보다 더 행복하게 살다가 생을 마친 사람이 있을까싶다. 그녀는 자연에 대한 외경을 품고 찬양하며 시류를 벗어나 하늘이 준 복락을 한껏 누렸다. 얼마 전 ‘타샤 튜더(Tasha Tudor)’라는 제목의 90분짜리 다큐멘타리 영화를 보고 그녀의 이 같은 삶을 처음 알게 되었다. 그리고 고요한 물 교의 신자같은 삶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되었다.

근래 나는 너무, 많이 지쳐 있었다. 세상 돌아가는 일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고 그것 때문에 밤잠을 설치곤 했다. 예를 들면 이런 것들이다. 나라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정말 사회 일각에서 주장하듯 사회주의로 가는가. 연방제 통일이 되면 어떤 체제에서 살게 되는 것일까. 경제가 고꾸라지고 있다는데 나는 어떡해야 하는가, 등등. 그런 가상의 공포 같은 것들을 만들어놓고 거기서 공황장애를 느끼곤 했다. 참 바보 같은 짓이다.

타샤 튜더는 그런 나에게 ‘인생은 기쁨을 누리기에도 너무나 짧다.’고 일갈한다. 맞다. 지금 내게 주어진 이 시간에서 기쁨을 찾아 그걸 누려야 한다. 세상은 내가 걱정 아니해도 갈 데로 간다. 내가 상관할 바가 아니다. 헤겔이 말한 절대정신 같은 것이 이끄는 대로 가게 되어 있는 거다. 나같은 한 사람이 걱정한다고, 불만을 품는다고, 목소리를 낸다고 해봤자다.

그건 수레 앞의 한 마리 사마귀에 지나지 않는다. 사마귀가 두 발을 들어 올려 수레를 멈출 수 있는가. 일찍이 어머니에게 내가 물었다. ‘어머니는 오래 살으셨으니 인생이란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으세요?’ 그때 구순이 가까운 어머니는 대답했다. “인생이 무엇이냐고? 나는 모른다. 그냥 살아 있으니까 사는 것이지.”

타샤 튜더는 우리 어머니가 한 말에 가려져 있는 ‘기쁨’을 강조한다. 살아 있으니까 사는데 그 속에서 기쁨을 찾아 살라는 거다. 그 말이 그 말이다. 세상을 어둡게, 비극적으로 볼 하등 이유가 없다. 인생은 딱 1회 공연하는 연극이다. 두 번째 공연 같은 건 없다.

불타는 듯한 붉은 낙엽이 지는 모습, 새파란 하늘에 둥둥 떠가는 흰 구름 조각, 가을 저녁의 화려한 일몰, 숲을 지나는 소슬한 바람소리, 야윈 강물이 빈 들판을 흐르는 풍경 등 세상은 아름다움으로 가득하다.

타샤 튜더는 ‘밤하늘의 찬란한 별들이 1년에 하룻밤만 뜬다면 얼마나 삭막할까.’고 독백한다. 정말 날마다 밤마다 하늘에 보석 같은 별들이 깜박이는 것은 또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말이다. 왜 이런 어마어마한 축복의 선물들을 제쳐두고 이러니 저러니 하고 나를 못살게 굴었을까.

나는 그저 ‘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하고, 결과는 정의롭고’(문재인 대통령)라는 정부가 표방하는 말대로 돌아간다고 믿고 ‘나’를 살면 되는 거다. 그 편이 편할 것 같다. 현실에 너무 집착하다보니 세상이 어둡게만 보인다. 누가 살인했다느니, 고용 세습 직장이 되었다느니, 믿기도 어렵고 믿기도 싫은 말들이 미세먼지처럼 떠돈다. 난 이제 그딴 건 상관 않겠다니까.

나는 이제 내 마음을 불안케 하고 싱숭생숭하게 하는 쓰잘 데 없는 것들에 더는 신경을 안쓰고 숨어 있는 기쁨들을 꿀벌처럼 찾아 모아 즐겨볼 참이다. 비록 정원은 없지만 저기 앞산을 내 정원으로 삼고. 앞산에 가서 낙엽들이 지는 모습을 보면서 천하 대세를 짐작해보려 한다.

천하대세란 다른 게 아니라 지금 가을이 한창이라는 거다. 그러니 가을을 즐기라는 거다. 오직, 자연만이 사람을 위로해줄 수 있다. 자연은 냉랭한 것 같지만 인간의 슬픔을 껴안아준다. 그리고 죽으면 품어주기까지 한다.

나는 무엇보다 현실에 지쳐 있어 더없이 위로가 필요한 상태다. 타샤 튜더는 자신의 삶을 이렇게 말한다. ‘더할 나위 없이 삶이 만족스럽다. 개들, 염소들, 새들과 여기 사는 것 말고는 바라는 게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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