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날 저녁
가을날 저녁
  • 문틈 시인
  • 승인 2018.10.17 1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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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빛이 집안 깊숙이 들어오는 고즈넉한 가을 해으름 때다. 혼자서 가만히 소파에 앉아 있다. 즐겨듣는 음악도, 책도 저만치 치워두고, 만추의 경치를 바라본다. 앞산 숲에 색색의 단풍이 들고 건듯 부는 바람에 낙엽들이 허공에 흩날리고 있다.

그렇다. 가을은 작별의 계절이다. 낙엽, 열매들이 매달려 있던 나뭇가지를 떠나고, 풀숲도 뽐내던 푸른 기운이 다해 시들어간다. 추수를 시작한 들판도 텅 비어간다. 하늘은 한껏 부풀 듯 높이 떠오른다.

북적이던 세상이 갑자기 장이 파한 뒤처럼 휑한 느낌이다. 썰물이 물러간 갯벌을 보는 느낌. 모든 것들이, 이렇게 너와 내가, 작별을 고하는 가을이다. 나는 늘 한해의 끝은 가을이라고 생각해왔다. 겨울은 다음 해의 봄을 잉태하는 긴 침묵과 인고의 계절이고.

가을에는 대체로 쓸쓸한 기분이 된다. 밴자민 프랭클린은 가을의 공기 성분은 다른 계절과 다르다고 주장한다. 외롭고 쓸쓸한 마음을 자아내는 공기 성분이 따로 있단 말일까. 어떤 시인은 가을에는 편지를 써요, 하고 노래하지만 편지쓰기는 가을의 쓸쓸함, 고독감, 우울감을 더욱 심화시키기 십상이다.

가을에는 편지를 쓰길 저어하되 대신 정히 편지를 쓸 양이면 낙엽 한 잎을 주워 봉투에 넣어서 보내는 것이 좋을 듯하다. 사실 저 바람에 지는 낙엽들이야말로 가을이 우리에게 보내오는 편지들이다. 한 잎 한 잎의 엽서들에는 봄의 찬가와 여름의 성숙과 가을의 성취가 기록되어 있다. 엽서를 들여다보면 생의 찬가도, 아름다운 성숙도, 빛나는 성취도 종당엔 일생을 마치고 사라져가는 전 우주적 생명의 법도가 새겨져 있다. 밤새워 읽을 경전이 따로 없다.

작별은 생명의 법칙이고 우주의 법칙이다. 부모, 연인, 가족, 친구, 누구도 서로간에 미구에 다가올 작별을 피할 수 없다. 젊은 시절 고향집에 갔다가 돌아올 때면 어머니는 사립문 앞에 나와 서서 떠나가는 내 뒷모습을 지켜보며 오래도록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떠나는 발걸음이 무거워 뒤돌아볼 때 어머니는 팔을 크게 내저으며 ‘잘 가거라’ 목소리는 안 들리고 손짓만 보였다. 당산나무를 지나 동구밖까지 걸어갔을 때 다시 한 번 뒤돌아보았는데 아직도 어머니는 그 자리에 작고 희미한 모습으로 서서 팔을 내저었다. 한 걸음 한 걸음이 무겁기만 하던 발걸음. 다 가을에 일어난 작별이었다.

잘 가거라, 잘 가거라. 어머니가 내 청춘 시절 대처로 떠날 때마다 그렇게 했듯이 나는 이 가을에게 손을 저어 인사를 보내고 싶다. ‘잘 가거라, 잉.’. ‘잉’ 하고 말끝에 살짝 붙이는 마음의 안쓰러움, 바람, 기원을 담아서 작별의 인사를 보낸다. 모든 것이 떠나가는 계절, 사라져가는 계절, 나는 가을이 남기고 간 잔해들을 하나하나 살펴보며 깊은 사색에 빠져든다.

어릴 적 도시로 진학할 때 고향 동무들을 두고 나 혼자 떠나는 것이 너무 슬프고 기이했다. 왜 나는 이곳에 있고 너는 그곳에 있을까. 모두들 왜 이곳에서 저 곳으로 떠나야 하는 것일까. 그리고 오랜 날이 지난 후 탄허 큰스님으로부터 “모든 생겨난 것은 필히 사라진다.”는 한 말씀을 들었다. 낳고 죽는 것뿐 아니라 작별도 같은 원리 속에 있는 것임을 알았다.

어쩌면 큰스님은 이런 가을에 만상을 지어내는 시공의 본질을 깨쳤는지 모른다. 작별, 모든 물상은 생겨났을 때 이미 사라지게 되어 있다니. 모든 것이 나그네 같기도 하고, 금방 있던 것이 없어지는 환상 같기도 하다. 하이쿠 시인 바쇼는 ‘해와 달은 영원한 과객이고 오가는 세월 또한 나그네이다.’고 쓴다. 탄허 스님은 그 해와 달도, 세월도 사라진다고 말한다.

영원한 시인 윤동주는 노래한다.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가을로 가득 차 있습니다.//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가을속의 별들을 다 헤일 듯합니다.//가슴 속에 하나 둘 새겨지는 별을/이제 다 못헤는 것은/쉬이 아침이 오는 까닭이오./내일밤이 남은 까닭이오./아직 나의 청춘이 다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하나 나에게는 청춘도 사라져버렸다. 가을이 가는 뒷모습을 보며 나 역시 나그네임을 깨닫는다.

가을은 도를 깨친 스님처럼 저기 산마루를 휘적휘적 넘어가고 있다. 산마루 위에는 한 조각 흰 구름이 머물러 있다. 모든 것은 작별이 예정되어 있다고, 언젠가는 사라져가는 것이라고 가을이 남기고 가는 말을 말없이 듣고 있는 것 같다,

구름은. 산에서 들에서 떠날 채비를 서두르는 가을의 모습을 바라본다. 어느새 산마루 구름은 사라지고 앞산 나무숲에서 우수수 낙엽들이 꽃처럼 지고 있다. 사나이가 홀로 속으로 울음 울기 좋은 가을 저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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