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 향 머금은 번안시조(96) 묏버들 가려 꺾어
한시 향 머금은 번안시조(96) 묏버들 가려 꺾어
  • 장희구 시조시인․문학평론가
  • 승인 2018.10.15 17:4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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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밤비 추적추적 내려 새 잎이 나거들랑

1573년(선조 6년) 가을이었다. 고죽 최경창이 북도평사(병마절도사 보좌관) 발령을 받아 함북 경성으로 부임하다가 함남 홍원의 객관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홍원 현감은 고죽을 극진히 대접했다. 타관 객창을 흩뿌리는 가을비가 시름에 겨워 객수(客愁)로 돌아눕는 그의 침소에서 현감이 보낸 관기 홍랑과의 인연이 시작된다. 6개월 후 서울로 떠나는 고죽과 이별할 때 눈물 흘리며 홍랑이 읊은 시조 한 수가 연모지정의 정수이기에 따로 번안하지 않고 그대로 옮긴다.

 

묏버들 가려 꺾어(折柳=飜方曲) / 홍랑

묏버들 가려 꺾어 보내노라 님 손에

자시는 창 밖에다 심어 두고 보소서

밤비에 꽃잎 나거든 나 본 듯이 여기소.

折柳寄與千里人      人爲試向庭前種(홍랑 作)

절류기여천리인      인위시향정전종

須知一夜生新葉      憔悴愁眉是妾身(고죽 作)

수지일야생신엽      초췌수미시첩신

 

깊은 밤비가 추적추적 내려 새 잎이 나거들랑(折柳)으로 제목을 붙여본 칠언절구다. 이 시조 원 작자는 홍랑(洪娘:?~?)이다.

위 한시 원문을 번역하면 [버들가지를 곱게 골라 꺾어서 임에게 보내오니 / 이 꽃을 받으시어 주무시는 방의 창가에 심어 두고 보시옵소서 // 행여 깊은 밤 비가 내려 새 잎이 나거든 / 마치 나를 본 것처럼 반갑게 여기소서]라고 번역된다.

위 시제는 [묏버들 가려 꺾어]로 번역된다. 위 한시는 홍랑이 고죽을 위해 지어 부른 [묏버들 가려 꺾어] 시조를 듣고 고죽 자신이 한시역으로 했으니 이를 가리켜 [번방곡(翻方曲)]이라 한다.

이 시조에 화답하는 고죽의 [증홍랑시(贈洪娘詩)] 또한 이별의 애달픔이 묻어나는 작품이다. 두 시인이 연모지정을 담아 주고받은 시문이 절절하여 시적화자의 입장으로 돌아가 더는 감상할 필요가 없어 보인다. 다만 두 시인의 애틋한 사연만을 더 정리해 보고자 한다.

고죽은 홍원 현감의 양해를 얻어내 홍랑을 남장시킨 후 함께 경성 막중(幕中)으로 부임하게 된다. 서울에서 천리 길이 넘는 경성은 군사적으로 중요한 변방의 요충지로 당시의 제도는 이 곳에 처자식을 동행할 수 없도록 되어 있었다.

이후 고죽의 이와 같은 일이 경성 임지에서 관기와의 동거사실이 탄로나 곧바로 파직당한 뒤 중병에 들었다. 홍원에서 이 소식을 전해들은 홍랑은 남장으로 7주야를 걸어 서울의 고죽 집을 찾아왔다. 정실부인 선산임씨와의 극진한 간병으로 얼마 안 가 고죽은 쾌유됐다. 고죽의 첩실이 된 홍랑은 아들 ‘흡’을 낳게 된다.

위 감상적 평설의 요지는 ‘묏버들 꺾어 임께 보내니 주무신 창에 심으소서, 밤비에 새잎 나거든 나 본 듯이 반겨 여기소서’라는 상상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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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홍랑(洪娘:?~?)으로 여류시인이다. 함남 홍원 지역의 관기로 고죽 최경창의 첩이었을 뿐만 아니라 남편을 사랑하는 홍랑의 정성은 지극했다. 홍랑이 지은 이 시조가 훗날 우리 시조 문학사에 최고의 절창 연시가 될 줄 누가 감히 알았겠는가. 홍랑은 그랬다. 고죽의 나이는 방년 35세였다고 하니.

【한자와 어구】

折柳: 버들가지. 寄與: 붙이어 주다. 千里人: 멀리 있는 임(사람). 人爲試: 사람들은 시험 삼아 ~을 하다. 向庭前種: 정원 앞을 향하여 (버들을) 심다. // 須: 모름지기. 행여나. 知: 알다. 혹은 알게 한다. 一夜: 하룻밤 사이에. 生新葉: 새잎이 나다. 憔悴愁: 근심하여 수척하다. 眉: 눈으로. 是妾身: 이 신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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