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동네 인문학 기행’ 소견
‘우리 동네 인문학 기행’ 소견
  •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 승인 2018.09.12 08:5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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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귀정과 절골을 답사하고

8월 30일 오전, 비 오는데 답사에 나섰다. ‘교육문화 네트워크 동행’의 ‘우리 동네 인문학 기행’인데 광주 서구 만귀정과 절골을 답사했다.

일행 23명은 만귀정(晩歸亭)에 도착했다. ‘아름다운 서구 8경, 제1경 만귀정’이라는 안내판이 돋보인다. 만귀정은 1670년경 남원 출신 장창우가 광주 서구 동하 마을에 이거한 후 후학을 양성하기 위해 지은 정자이다.

만귀정

만귀정 계단을 내려와 연못 다리를 건너면 습향각(襲香閣)이 있는데 1940년에 7세손 장안섭이 지었다. 습향각을 지나니 묵암정사이다.1)

습향각 현판

거센 비속에 이른 점심을 정자에서 먹고 절골(寺洞)로 향했다.

절골 경로당 앞에 버스를 세웠다. 다행히 날씨는 개었다. 그런데 박상 선생 재실과 묘소를 가야하는 데 안내판이나 이정표가 보이지 않는다. 필자도 방문한 지가 9년이나 되어 당황했다. 경로당 근처에 집들이 들어서서 더 헷갈린다.

마침 멀리에 이정표가 하나 있다. 그 길을 따라가니 완절문(完節門)이 보이는 재실이 있다. 이곳이 바로 눌재 박상(1474~1530) 선생의 재실 봉산재이다. 완절이란 절의를 완성한다는 뜻이다.

박상 선생은 절의의 선비로 호남의리사상의 실천가였다. 그런데 봉산재는 닫혀 있다. 연락처도 안 적혀 있다. 문틈으로 재실을 보아야 했다.

봉산재(재실) 완절문

다음은 박상 선생 묘소이다. 이번에도 이정표가 없어서 당황스럽다. 다행히 재실 바로 옆에 올라가는 길이 포장 되어 있어 이 길이 맞거니 생각하고 앞장섰다. 2~3분 올라가니 눌재 선생 묘소가 나온다.

묘는 박상과 부인 유씨 묘가 따로따로 인데 묘비에는 부인 진양유씨가 왼쪽이라고 적혀있다. 먼저 묘소에 절을 했다. 그리고 박상과 부인 유씨에 대해 설명했다.2)

박상 묘소

박상은 1491년에 부인 진양유씨와 결혼했다. 1501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1505년 전라도 도사로 근무했고, 1506년 8월에 나주에서 연산군의 애첩 아버지 우부리를 장살했는데, 9월에 중종반정이 일어났다.

그런데 1506년 11월 25일에 부인 유씨가 별세했다. 그녀는 3남 2녀를 낳았는데, 아들 하나와 딸 둘이 한꺼번에 전염병으로 부인보다 먼저 죽었다.

홀아비가 된 박상은 남은 아들 둘을 데리고 살며 슬픈 마음으로 ‘아내와 자식들을 협곡에 묻고 슬퍼하다’ 시 3수를 지었다.

중요 부분만 음미 하자.

1.

지난 날 생각하니 당신과 부부되어

흰 머리 되도록 백년해로 하자고 했었지

선비의 생활 어렵기 그지없어

문 빗장 떼어 밥을 짓고 머리 잘라서 쌀을 찧었지.

 

하루아침에 첫 벼슬 얻자 좀 편해졌다고 기뻐하며

번화한 서울에서 초라한 살림을 같이 했었지.

손에 손 잡고 옛집으로 돌아왔는데

갑작스레 저 세상으로 가고 말았구려.

 

3.

당신은 어찌 이다지도 서둘러 작별하였소. 너무 슬프구려.

황천이 겹겹이라 길이 막혀 찾아 갈 수가 없구려.

내 귀 곁에다 앙앙 우는 어린 것 남겨 주어

토닥토닥 두드리면서도 시름 속에서 잊지 못하오.

 

배고프면 먹을 것 달라하고 목마르면 마실 것 찾아

낮에는 한 그릇으로 먹고 밤에는 한 이불 덮는다오.

외롭게 어미도 없이 너는 누구를 믿고 살려느냐.

밤새도록 자지도 않아 내 옷깃을 적시네.

 

다음으로 가는 곳은 박상의 부친 박지흥과 형 박정의 재실과 묘소이다. 마을길을 따라가니 하촌공(박정)의 재실이 나오고 찬성공(부친 박지흥)의 재실도 뒤따라 있다. 그런데 묘소 가는 길이 큰 길과 윗길 두 갈래여서 헷갈린다. 큰 길로 갔더니 한참을 가도 묘소가 나오지 않아 포기하고 말았다. 비가 쏟아진 탓도 있었다.

절골 경로당 앞으로 돌아와 다시 한 번 둘러보아도 안내판은 없다. 서구청이 만귀정 안내판은 그리 잘 만들었더니만, 절골에는 안내판 하나 없다. 참으로 안타깝다.

역사 유적지 답사도 안내판, 이정표가 있어야 사람들이 찾기가 편하다. 광주 서구청이 신경 써 주기 바란다.

1) 습향각 현판에는 ‘소화 임오 춘’이라고 적혀 있다. 연도를 환산하니 1942년이다.

2) 박상의 절의(신비복위소)와 청렴(청백리에 두 번이나 선정됨)과 문장에 대하여는 버스에서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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