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화과를 먹을 때
무화과를 먹을 때
  • 문틈 시인
  • 승인 2018.09.05 0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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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으로 돌아오는 길 멀지 않은 곳에 커다란 재래시장이 있다. 평소 별로 갈 일이 없어서 거의 들르지 않고 지낸다. 오늘은 무슨 마음이 동했는지 발길이 그쪽으로 갔다. 오랜만에 구경삼아 들렀다. 낯익고 정겨운 온갖 상품들이 즐비하다. 부러 살 것도 아니면서 이것저것 마치 추억을 되새기듯 눈길을 주면서 천천히 지나갔다. 아직도 그곳에는 옛스런 식품, 공구, 옷, 과일, 생선, 떡볶이, 별의별 것들이 있어 옛이야기를 하듯 정겹게 다가왔다.

어느 작은 가게 앞에서 스티로폼 박스에 담긴 무화과를 보고는 절로 걸음이 멈춰졌다. 입술에 살짝 루즈를 바른 듯, 작은 미소를 머금은 듯한 귀엽게 생긴 무화과들을 보자 갑자기 잊혀진 추억이 생생히 살아났다. 무화과는 마치 흘러간 옛 시절로부터 돌아온 귀물처럼 보였다.

무화과를 언제 먹어보았더라? 시 외곽에 있는 절에 방을 얻어 묵고 있던 10대 시절, 절 담장 가까이 저 아래 단독주택 마당에 키 큰 무화과나무가 한 그루 서 있었다. 막 입산한 내 또래 행자와 함께 작당하여 밤에 담 너머로 손을 뻗어 무화과나무 잎을 그러쥐고는 조심조심 잎을 당겼다.

무화과나무 잎은 크고 질긴 편이라 잎 가장자리를 손가락으로 겹쳐 쥐고 당기면 가지가 당겨졌다. 더 당기면 밑에 굵은 가지까지 휘어져 우리 쪽으로 끌려왔다. 그렇게 남의 집 무화과를 따먹었다. 하늘에 떠 있는 달은 집주인이 잠깨어 나오는지 망을 보았다.

흡사 마귀의 유혹에 홀려 인류의 조상이 에덴동산의 선악과를 따먹듯이. 아담이 따 먹었다는 그 금단의 과일은 어쩌면 무화과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인류의 조상이 맨 처음 부끄러움을 알고 신체의 일부를 가린 것이 무화과나무 잎이었다던가.

무화과는 예사 과일이 아니다. 무화과는 사과꽃처럼 우리 눈에 보이는 꽃을 피지 않는다. 아니, 꽃이 핀다. 꽃은 무화과 꼬투리 안에 피는데 그 꽃이 자라 우리가 먹는 무화과가 된다. 무화과의 껍질은 꽃받침이고, 붉은 속이 꽃인 셈이다. 꽃 하나마다 씨가 하나 있고 껍질이 단단한 과일 하나를 만드는데 무화과를 먹을 때 바삭바삭한 식감을 내는 것이 그것이다. 그러니까 무화과 하나를 먹을 때 우리는 여러 개의 무화과를 한꺼번에 먹는다는 이야기다.

무화과의 비밀은 이것으로 끝이 아니다. 무화과는 과일 안에서 꽃이 피어 벌이 꽃가루를 매개시켜줄 때 애를 먹는다. 꽃이 숨겨져 있으므로 무화과 말벌이라는 것이 무화과 속으로 들어간다. 무화과의 수정을 전담하도록 무화과나무와 특별한 계약관계에 있는 벌이다.

무화과나무는 이 무화과 말벌이라는 놈이 무화과 꽃가루를 퍼뜨려 주어야 대를 이어 살아남을 수 있다. 한 마디로 무화과나무는 이 말벌이 없으면 생존할 수가 없고 무화과 말벌 또한 무화과가 없이는 대를 이어갈 수가 없다.

이토록 기이한 무화과는 정말 비밀 같은 스토리가 더 있다. 성서에 예수가 시장기를 느끼고 무화과나무에 가본즉 잎사귀만 있고 열매가 없어서 크게 실망하여 무화과나무에 저주를 퍼부은즉 말라죽고 말았다는 대목이 있다.

팔레스타인 지역에선 무화과는 3월에 잎이 나서 5월에 열린 첫 무화과는 따서 버리고, 6월에 잎이 나 맺힌 무화과를 여름 내내 계속 따먹는다고 한다. 처음 열린 무화과를 따줘야 두 번째 이후 무화과가 맛있다고 한다. 처음 무화과가 열리지 않은 그 나무는 여름에도 열매가 열리지 않을 나무였다. 성서의 내용이 이해되는 대목이다.

무화과는 향도 좋거니와 과육이 입안에서 스르르 녹는 단맛이 일품이다. 필시 밝혀지지 않은 몸에 좋은 성분도 들어 있음직하다. 농약을 치지 않으므로 껍질째 먹어도 된다고 한다. 나는 그날 무화과를 너무 많이 사 온 탓에 이틀이 지나고 나서 남은 무화과들이 흐물흐물해져 먹느라 애를 먹었다.

내가 하려는 무화과 이야기는 따로 있다. 무화과의 비유다. 사람 눈에 꽃이 안 보인다고 해서 무화과에 꽃이 없는 것이 아니라는 거다. 흔히 일찍 죽은 이를 두고 꽃봉오리도 피지 못하고 운명을 달리했다느니 하는 안타까운 말을 하기도 하지만 달리 생각해보면 모든 것들은 과일 안에 씨를 품고 있듯이 존재 자체 안에 꽃이 피어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것이 곧 무화과처럼 열매가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꽃이자 열매인 무화과는 생각해볼수록 별스런 과일이다. 영어로 무화과(fig)의 어원은 '가린다'는 뜻이라고 한다.

나의 버릇은 자연으로부터 늘 비유를 얻어내려는 것인데, 그러다보니 자연이 가르쳐주는 것이 참 많다. 성서의 유명한 무화과의 비유 즉 ‘무화과나무에 새잎이 나면 여름이 가까이 온 줄 알라.’고 한 말은 두고두고 늘 생각케 한다. 히브리어로 ‘여름’은 ‘종말’과 같은 뜻이라는데 이 한 문장이 얼마나 깊은 뜻이 있는지 생각해볼만하지 않은가?

철없던 시절 남의 집 무화과를 따먹은 이래 지금껏 일일삼성(一日三省)으로는 모자랄 잘못들을 저지르며 살아왔다. 저녁에 기도를 할 때는 항상 그날의 잘못을 사뢴다. 아무 것도 하지 않은 것도 잘못이다. 귀한 시간을 허비한 것도 큰 잘못이다.

남이 안 알아주더라도 무화과처럼 속꽃을 피며 살고 싶다. 무화과는 우리 남도의 나주, 영암, 신안 같은 데서 잘 자란다. 남도는 귀한 무화과의 땅이다. 무화과를 먹을 때 당신은 꽃을 먹는다. 놀랍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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