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부신 연초록의 장구목
눈부신 연초록의 장구목
  • 시민의소리
  • 승인 2002.05.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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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라는 단어를 되뇌이면 그 말에도 계절이 담겨있는 느낌을 감지한다.
겨우내 잿빛 일색이었던 세상의 단조로운 색감들에 대해 증오의 마음을 어쩌지 못할 때 봄이 찾아온다.

그러면 그 조그마한 새싹부터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감히 다른 계절에는 보이지 않았던 비린내 나는 새싹들이 신비하게도 눈에 꽉 차 들어오는 계절이 바로 봄이다. 대개의 새싹이라는 것이 무더기로 나는 것이 아니라 여기 저기 조금씩 세상에 드러나기 때문에 사람들은 여기 저기를 바라보는 것에 스스로 익숙해 질 수 있다.
아마도 "봄"은 바로 보는 것이 무감했던 겨울과는 완연하게 달라 볼 것 투성이라는 의미에서 이름하였는지 모를 일이다.

하여튼 그런 봄날 사무실 혹은 안방을 지키는 것은 우울한 일이다. 벌써 세상의 몇몇 대표를 자임한 기관에서는 토요일까지 휴무를 시행하고 있는데 말이다.
그런 여가의 시간이 확장되는 해를 맞아 발걸음 상쾌한 테마여행 코스를 만들어 떠나 보았다.

여행의 코스는 순창의 허한 북방을 지키고 있는 남계리 장승을 보고 주말 명예 이장이라는 독특한 분이 주말에만 깃들여 살고 있는 임실군 덕치면 장산 마을을 거쳐 영화 "아름다운 시절"의 촬영지인 천담 마을과 구담 마을까지 버스로 이동하여 그곳에서부터 걸어서 섬진강의 징검다리를 건너고 싸리재, 장구목을 거쳐 영화 "복수는 나의 것"을 찍었던 구미 마을까지 가는 코스였다.



비교적 많은 인원들과 가는 길은 힘든 여정이다.
숫자가 많다는 것은 그만큼 각각의 개성들이 도드라질 수 있고 전체를 이끌어 간다는 것이 수월치 않다는 것을 반증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택한 가이드의 방법은 스스로의 자율성에 의지하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것들에 대해 열어 두라는 것이 여행의 가장 큰 주문이다. 오감을 열어두면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여지기 시작하는 법이 여행이 주는 선물이다.

구담에서부터 그런 자유스러움을 부여했다. 구담의 클라이막스는 활처럼 굽이치는 강물을 바라보며 우뚝 서 있는 당산나무이지만 가장 먼저 앞장을 섰던 사람은 나무보다 강이 먼저 눈에 들어왔던 탓에 스스로 강물로 사람들을 이끌고 가버렸다.



몇일전 내린 비로 물살이 제법 거세게 보였지만 더운 날씨는 물살보다 물이 더 정겨워 보이게 만들었는지 모두들 아무 말 하지 않아도 절로 양말을 벗고 문명에 찌든 불우한 흰색의 종아리를 드러냈다.
한 손에는 신발을 들고 남은 손으로 허우적 거리며 균형을 잡고 건너기 시작하는 답사팀들의 모습에서 나는 누군가 물에 풍덩 몸을 적셔주길 바랬다.
그런 나의 기원은 그대로 하늘에 닿아 두명이 바위에 미끄러져 물에 몸을 적셨다. 그리고 이리 저리 꾀를 부리며 모처럼 발에 기운을 모은 다른 사람들은 불행하게 그 강을 건넜다.


어릴적 저마다 한두번은 건넜을 법한 징검다리를 이렇게 멀리서 찾아야 하는 현실에 대해 잠시간의 얘기를 나누고 강에 깃들여 사는 꺽지와 쏘가리 얘기들을 하면서 텅빈 집들이 아직 허물어지지 않은 싸리재 마을을 거쳐 이제 1킬로 정도를 걷는다.

다음 목적지는 장구목이다. 욕심 많은 20명의 떼도둑들이 바위를 훔쳐 경기도의 야산에서 10억을 받고 팔려고 했다는 바위의 기구한 사연과 기묘한 형태는 전라도에도 이런 아름다운 산과 강과 바위가 있다는 것을 처음본 사람들에게는 놀라운 일일 뿐이다.

연초록으로 물들어가는 섬진강의 장구목과 구미 마을 사이의 강길의 모습은 그저 상상속으로 남기도록 한다. 너무나 아름다워 내 손목이 부끄러움에 치를 떨지 모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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