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 향 머금은 번안시조(89) 희우정송가[1]
한시 향 머금은 번안시조(89) 희우정송가[1]
  • 장희구 시조시인․문학평론가
  • 승인 2018.08.21 1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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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이 서교에 납시어서 놀이함이 아니오

태종은 대군 셋을 두었다. 첫째는 양녕대군이요, 둘째는 효령대군이었으며, 셋째가 성군이신 충령대군이었다. 장자가 보위를 이어받은 전통을 깨고 셋째 충령이 보위를 이어 받으니 조선 최고의 임금으로 추앙 받는 이가 세종이다. 보위를 물려받은 세종은 두 형님을 극진하게 모셨다. 세종이 서교에 납시신 것도 그러한 예의의 한 방법이었을 것이다. 성군이 정자의 이름을 내리니 그 덕과 영화가 하늘에 닿았다고 칭송하며 읊었던 시 첫째수를 번안해 본다.

 

喜雨亭頌歌(희우정송가)[1] / 춘정 변계량

정자에 봉황새 나는 듯이 앉는 듯이

그 누가 지었는가, 어지신 우리 군후

서교에 왕의 백성은 가뭄 걱정 필요 없네.

翼彼新亭如鳳斯騫      誰其作之君侯之賢

익피신정여봉사건      수기작지군후지현

王出西郊匪遊匪□      民方播種憂旱于田

왕출서교비유비전      민방파종우한우전

 

왕이 서교에 납시어서 놀이함이 아니오(喜雨亭頌歌)로 변역해본 율(律)의 첫째구인 팔언고시다. 작자는 춘정(春亭) 변계량(卞季良:1369~1430)이다.

위 한시 원문을 번역하면 [날 듯한 새 정자가 봉황새 나는 듯한데 / 그 누가 지었는가 어지신 군후(君侯)였는데 // 왕이 서교에 납시어서 놀이함이 아니오 / 백성이 한창 씨앗 뿌리는데 가뭄을 걱정하심이었다]고 번역된다.

위 시제는 [희우정을 기리는 노래1]로 번역된다. 다음 예화 한 토막에 귀 기울여 보자. 성군의 총애를 받고 있는 한 신하가 있었다. 하루는 어가를 모시고 대군의 별서에 도착했다. 구름이 끼더니만 비가 내렸다. 성군은 이 별서의 이름을 즐겁게 비 내리는 정자라는 뜻을 담아 ‘희우정’이라 이름하면서 정자의 송가를 지어 부르라 명했다.

시인은 임금의 명을 받아 즐겁게 이 정자의 송가를 지어 바친다. 날 듯한 새 정자가 봉황새 나는 듯한데 어지신 성군이 지어 불렀다고 칭송을 아끼지 않는다.

화자는 그 누가 희우정을 지었는가라고 자문하더니 어지신 군후(君侯)였다고 했다. 성군이 서교에 납시어 놀이한 것이 아니라 백성이 농사를 짓는데 씨앗 뿌리는 가뭄을 걱정한 한 것이라고 칭송한다. 성군의 덕을 길이 칭송하는 시상을 일으키고 있다.

후구로 이어지는 시인의 상상력은 [왕이 정자(亭子)에 계시니 때맞추어 비 쏟아지네 / 왕이 군후와 잔치하시는데 저 북소리가 둥둥 울린다 // 정자이름 내려 빛나는 영화가 전에 없었네 / 군후가 머리 조아리시니 임금의 덕이 하늘과 같네]라고 했다. 성군의 덕망을 칭송하고 있는 것이다.

위 감상적 평설의 요지는 ‘새 정자 봉황새 나는 듯 어지신 군후였다네, 왕이 납시어 놀이함 아니요 가뭄만을 걱정함이셨네’라는 상상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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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춘정(春亭) 변계량(卞季良:1369~1430)으로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해 네 살에 고시의 대구를 외우고 여섯 살에 글을 지었다. 1382년(우왕 8) 14세로 진사시에 급제, 1383년(우왕 9) 생원시에 급제, 1385년(우왕 11) 문과에 급제하였다.

【한자와 어구】

翼彼: 저기에 날다. 新亭: 새 정자. 如鳳斯騫: 봉황새가 나는 듯하다. 誰其作之: 그 누가 지었는가. [之]는 정자를 가리킴. 君侯之賢: 어지신 군후였거늘. // 王出西郊: 왕이 서교에 납시다. 匪遊匪전: 놀이함이 아니다. 民方播種: 백성이 씨를 뿌리다. 憂旱于田: 들에 가뭄을 걱정하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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