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 향 머금은 번안시조(85) 우후(雨後)
한시 향 머금은 번안시조(85) 우후(雨後)
  • 장희구 시조시인․문학평론가
  • 승인 2018.07.23 17:0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남아 있는 붉은 잎으로 푸른 물을 띄우네

소소히 부는 바람과 함께 가을은 쓸쓸하다. 거두는 계절이자, 떨어지는 계절이기 때문이다. 늦가을 비가 한번 내리면 언제 다가왔는지 매서운 바람을 동반한 겨울손님이 덥석 손을 부여잡는다. 어쩔 수 없는 계절의 탓이겠지만 떠나는 가을을 아쉬워한다. 새봄을 맞이하려는 부푼 기대를 갖고서. 거센 바람이 부니 수놓았던 수풀이 절반이 비었다. 이제 서서히 온 산이 가을빛을 거두어 가고 있으니 남아 있는 붉은 잎을 푸른 물을 띄우네라고 읊은 시 한 수를 번안해 본다.

 

雨後(우후) / 동고 최립

거센 바람 부는 아침 부슬비 내리더니

비단 같이 수놓은 수풀 절반 비었구나.

온 산은 가을빛 거둬 푸른빛을 띄우네.

朝來風急雨濛濛 錦繡千林一半空

조내풍급우몽몽 금수천림일반공

已作漫山秋色了 殘紅與泛碧溪中

이작만산추색료 잔홍여범벽계중

 

남아 있는 붉은 잎으로 푸른 물을 띄우네(雨後)로 번역해본 칠언절구다. 작자는 동고(東皐) 최립(崔岦:1539~1612)이다.

위 한시 원문을 번역하면 [거센 바람 부는 아침 부슬비 주룩주록 내리더니 / 수놓은 비단 같던 수풀 물결이 이제 절반은 비었구려 / 이미 온 산은 서서히 가을빛을 거두고 있으니 / 남아 있는 붉은 잎으로 푸른 물을 띄우고 있네]라고 번역된다.

위 시제는 [비가 온 뒤에는]으로 번역된다. 가을은 아침 저녁으로 소소함을 느끼게 한다. 인생으로 치면 시인의 나이 50을 넘기고 화갑인 60에 접어든 것으로 보인다. 늦가을엔 비애를 느낀다. 여름내 무르익었던 곡식을 거두어들이는가 하면 주렁주렁 열렸던 과일도 수확하게 된다. 한 생명을 푸르게 키워놓는가 했더니 낙엽만 말없이 떨어져 한 줌의 부토(腐土)로 돌아가는 엄숙한 순간이리라.

시인은 저물어가는 가을에 바람이 불고 비가 내린 시간에 서성인다. 거센 바람 부는 아침 부슬비 주룩주룩 내리더니 수놓은 비단 같던 수풀 물결이 이제 절반은 비었다고 했다. 봄의 꽃보다 더 붉어 비단을 수놓은 듯했던 가을 단풍이 이제는 듬성듬성 쓸쓸해 보인다. 화려함을 발산했던 가을 산은 이제 수수함으로 돌아와, 아직은 맑고 푸른 시냇물에 여전히 붉디붉은 나뭇잎을 흘려보내며 내년의 봄을 기약한다.

그러면서 화자는 온 산을 수놓았던 수풀은 절반이 비었다면서 가을빛을 거두고 있다고 했다. 외롭게 남아있는 붉은 잎을 푸른 물에 띄워 보내면서 싱그러운 푸르름을 더해 보고 싶다는 강한 소망을 담고 있다.

위 감상적 평설의 요지는 ‘아침 부슬비 주룩주룩 수풀물결 텅 비었고, 온 산엔 가을비 거둬 붉은 구슬에 푸른 잎 띄우네’ 라는 상상력이다.

================

작가는 동고(東皐) 최립(崔岦:1539~1612)으로 조선 중기의 문신이다. 호는 간이(簡易), 동고(東皐)이다. 1561년 급제, 재령군수·공주목사·전주부윤·승문원제조·강릉부사·형조참판 등을 역임 한 후 사직하고 평양에 은거하였다. 주청사의 질정관·주청부사로 명나라에 여러 차례 다녀왔다.

【한자와 어구】

朝: 아침. 來風: 바람이 불다. 急雨: 거센 비가 내리다. 濛濛: 비가 내리는 모양. 錦繡: 비단으로 수를 놓다. 千林: 많은 숲. 一半空: 절반은 비다. // 已: 이미. 作: 짓다. 漫山: 온 산. 秋色了: 가을빛을 거두다. 殘紅: 남은 붉은 잎. 與: ~으로. 泛: 띄우다. 碧溪中: 푸른 시냇물 가운데.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