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 향 머금은 번안시조(84) 증홍랑시(贈洪娘詩)
한시 향 머금은 번안시조(84) 증홍랑시(贈洪娘詩)
  • 장희구 시조시인․문학평론가
  • 승인 2018.07.18 14:0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지금은 구름과 비에 청산이 모두 어두워라

고죽과 홍랑의 사랑 이야기는 당시 조선사회에서 용서되지 않았다. 홍랑은 함경도, 평안도 주민의 도성출입을 제한하는 양계지금(兩界之禁)법을 어겼고, 고죽은 국모 인순왕후 청송심씨가 훙서(薨逝)한 국상 중임에도 이른 바 첩을 들이는 죄를 저질렀다. 이 사건은 조선 중기사회를 뒤흔든 최고의 러브스캔들로 장안의 입방아에 오르내렸다. 둘은 다시 헤어지는 운명이 되었다. 홍랑의 시조 [묏버들 가려 꺾어]에 화답하는 고죽이 읊었던 시 한 수를 번안해 본다.

 

贈洪娘詩(증홍랑시) / 고죽 최경창

서로를 바라 보다 난초를 드리나니

지금은 멀리 가면 언제나 돌아오나

구름비 청산 어두워 함관령을 불지마소.

相看脈脈贈幽蘭 此去天涯幾日還

상간맥맥증유난 차거천애기일환

莫唱咸關舊時曲 至今雲雨暗靑山

막창함관구시곡 지금운우암청산

 

지금은 구름과 비에 청산이 모두 어두워라(贈洪娘詩)로 번역해본 칠언절구다. 작자는 고죽(孤竹) 최경창(崔慶昌:1539~1583)이다.

위 한시 원문을 번역하면 [사랑을 심어 놓고 바라보다 난초를 드리니 / 이번에 떠남은 멀리 가지만 언제나 다시 돌아오리 // 그대여 함관령에서 맺은 옛 노래일랑 부디 부르지 마소 / 지금은 구름과 비에 청산이 어두워라]라고 번역된다.

위 시제는 [홍랑의 시조에 답하여 주다]로 번역된다. 두 시인의 연모지정은 국익을 손상하는 일이 아니었다. 선조의 특명으로 복직된 고죽은 종성부사로 부임했다가 객사하니 그의 나이 45세였다. 이 사실을 알게 된 홍랑은 고죽의 무덤 앞에 초막을 짓고 3년간 두문불출하며 시묘살이를 했다.

여인이 심산유곡에서 시묘를 한다는 건 대단히 위험하고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서 홍랑은 얼굴을 심하게 훼손시켜서 뭇 남성의 접근을 막았고, 숯덩이를 삼켜 스스로 불구가 되었다.

임진왜란(1592)이 일어나자 홍랑은 고죽의 문집만을 챙겨 해주최씨 문중에 전한 뒤 자취를 감췄다. 수년 후 홍랑은 고죽의 묘 앞에서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됐다.

이런 연유로 한국문학사에 빛나는 ‘고죽유고’가 전해졌다. 시문에 나온 ‘함관령 옛 노래’는 함흥과 홍원 사이에 있는 고개로 홍랑이 읊은 이별시 말한다.

후손들은 고죽의 무덤(부인 선산임씨와 합장) 앞에 자좌오향(정남향)으로 홍랑을 묻었다. 고죽은 전남 영암 태생으로 해동공자로 일컫는 최충(984~1068)의 18대손으로 경기도 파주시 교하면 다율리 해주최씨 선산(先山) 발치에 함께 묻혀 있다.

위 감상적 평설의 요지는 ‘사랑 심은 난초 보니 멀리 떠나 언제 오나, 함관령 노래 부르지 마소 구름 비에 청산만 어두워’ 라는 상상력이다.

================

작가는 고죽(孤竹) 최경창(崔慶昌:1539~1583)으로 조선 중기의 시인이다. 정철, 서익 등 명류들과 같이 삼청동에서 노닐었으며, 사람들이 이 모임을 [이십팔수회]라고 일컬었다. 백광훈, 이달 등과 함께 당시에 송시풍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는데, 문단에 당시풍을 열어 삼당시인으로 알려진다.

【한자와 어구】

相看: 서로 바라보다. 脈脈: 맥맥히. 贈幽蘭: 그윽한 난초를 드리다. 此去: 지금 가다. 天涯: 하늘 끝으로. 幾日還: 어느 날에 돌아올까. // 莫唱: 부르지 말라. 咸關: 함관령. 함남 함주군과 홍원군 사이의 고개. 舊時曲: 옛적의 노래. 至今: 지금. 雲雨: 구름과 비. 暗靑山: 청산이 어두워지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