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롱나무에 꽃이 필 때
배롱나무에 꽃이 필 때
  • 문틈 시인
  • 승인 2018.07.18 10:0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성서에 쓰였으되 ‘무화과나무에 잎이 나면 여름이 가까이 온 줄 알라’고 했다. 세상의 모든 움직임에는 그 일 전에 징조가 있다는 이야기로 읽힌다. 우리 선조들도 전날 밤 달무리가 지면 다음날 비가 온다는 이야기를 남겼다. 아내가 새로운 한 징조를 내게 가르쳐주었다. 배롱나무에 꽃이 피면 본격적인 여름 더위가 시작된다는 것이다.

해마다 꽃이 피는 시기를 여러 해 동안 날씨와 연관지어 가계부에 적어 왔는데 유독 배롱나무에 꽃이 피고 나서 대략 한 달 간은 뜨거운 여름이 계속되더라는 것이다. 아내가 이런 발견을 한 것은 무슨 연구를 하려는 것이 아니라 나이가 들어가면서 내분비 호르몬 이상으로 더위를 심하게 타게 되자 ‘여름 공포’를 이겨보려고 관찰한 독자적인 통찰이다.

이 관찰은 과학이 아니라 한 주부의 여름 지내기로 알아본 우연일 것이다. 어쨌거나 며칠 전부터 아내가 배롱나무에 꽃이 피었는지를 날더러 찾아보라는 것이다. 한데 바로 오늘 아내가 차를 몰고 가다가 군부대 울타리에서 배롱나무꽃을 발견하고는 ‘어머나, 벌써 피었네. 이제 한 달이 고비네.’하고 조금은 겁을 먹은 표정을 지었다.

이렇게 해서 배롱나무꽃과 폭염에 얽힌 아내의 개인사적인 관계를 알게 되었다. 아내의 발견이 맞는지 어떤지는 나는 모를 일이지만 여름을 두려워하는 아내가 그렇다니 그런가보다 할 뿐이다.

반면에 나는 그다지 더위를 타지 않는 편이다. 나는 왜 더위를 잘 안 느끼는지 알 수 없지만 아무리 더운 날씨라고 해도 에어컨을 틀지 않고 지낸다. 에어컨을 틀면 금방 콧물이 나오고 재채기를 한다. 샤워를 할 때도 더운 물로 한다. 찬물은 질색이다. 어릴 적 뒤안 감나무 밑에서 여름이 한창일 때 찬물로 시원하게 등목을 했었는데 지금은 딴판이다. 대체 무슨 징조인지 모르겠다. 건강하다는 징조는 아닐 것이다.

배롱나무는 백일홍나무라고도 부른다. 백일 동안 꽃이 피고 진다는 나무다. 아내가 배롱나무꽃을 두려워하기 전에는 그저 여러 꽃들 중의 한 가지로 여겼는데 아내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부터는 그 담갈색 꽃이 내게도 좀 껄끄럽게 느껴진다.

아내가 이 여름 공포를 일찍 느끼게 된 것이 마치 배롱나무꽃에 책임이 있기라도 한 것처럼. 그 꽃이 핀 것은 그저 ‘이제부터 본격적인 더위가 시작됩니다.’라고 하는 (아내가 주장하는) 징조일 뿐이다. 그런데 아내는 올해는 작년보다 배롱나무꽃이 일찍 피었다고 걱정스런 표정이다.

삼복더위에도 나는 방문을 다 닫고 잔다. 필경 나도 내분비 호르몬에 이상이 있어 가지고 다른 식으로 비정상적인 상태가 된 것이 아닌가싶다. 아내는 날더러 곧잘 ‘당신과 나는 온도가 안 맞다’고 불평한다. 차를 동승할 때도 아내는 에어컨을 틀고 내 눈치를 보며 내 쪽으로 난 풍구를 막는다. 이쯤 되면 과연 서로 온도가 안 맞는다는 말이 그른 말은 아니다.

이제사 배롱나무꽃이 피었으니 이 지글지글 끓는 여름이 대관절 언제 끝날지 모르겠다. 한 달도 더 넘게 끔찍한 더위가 계속될까 두렵다. 아내를 위해서라도 여름이 빨리 그 끝을 보여주었으면 싶다. 그런데 그것을 아는가. 이렇게 더운 여름이 인간 말고는 삼라만상에는 축복과도 같은 것인 줄을. 온갖 생명들이 길쌈을 하여 후손을 양육하고 열매를 익힌다.

용비어천가에서 ‘불휘 기픈 남간 바라매 아니 뮐쌔, 곶 됴코 여름 하나니./새미 기픈 므른 가마래 아니 그츨쌔, 내히 이러 바라래 가나니.’(뿌리가 깊은 나무는 바람에 움직이지 아니하므로, 꽃이 좋고 열매가 많으니/샘이 깊은 물은 가뭄에 그치지 아니하므로, 내가 이루어져 바다에 가느니)라고 노래한다.

여름이 열매인 것이다. 태양이 작열하는 여름을 건너 뛸 수가 없는 것이 자연의 이법이다. 시인 릴케도 ‘가을날’이라는 시에서 ‘주여, 때가 왔습니다. 지난 여름은 참으로 위대했습니다.’라고 여름을 찬양한 뒤 ‘마지막 과실들을 익게 하시고/이틀만 더 남국의 햇볕을 주시어/그들을 완성시켜 마지막 단맛이/짙은 포도주 속에 스미게 하십시오.’라고 노래한다.

여름이 지나갔다면서도 햇볕을 더 주어 마지막 과일들을 익게 해달라고 한다. 여름은, 아내한테는 안됐지만, 이렇게 햇볕으로 지구를 달구어야 하는 계절인 것이다. 하나의 과실을 익게 하기 위해서, 여름은 위대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배롱나무에 꽃이 핀 것은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삼라만상을 성숙케 하는 시기로 접어든다는 징조다.

이것은 다른 말이지만 여름은 태양으로부터 지구가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시기다. 지구는 태양의 주위를 타원형으로 돌고 있는데 돌다가 가장 멀리 떨어진 원일점의 때가 오는데 그때 지구가 햇볕을 가장 많이 받는다고 한다. 가장 멀 때 왜 가장 더울까. 지구의 자전축이 23.5도 기울어 있기 때문에 북반구의 여름은 덥고 남반구는 춥다고 한다.

원일점일 때 지구 전체의 평균온도는 근일점일 때보다 2.3도 더 높다는 것이다. 이런 현상은 지구에 대륙과 바다가 고르게 분포돼 있지 않아서 생긴다던가. 어쨌든 지금이 그때다. 아내는 여름을 더 참지 않으면 안 된다.

최신 HOT 뉴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