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갑석, 광주아픔 딛고 금배지로 부활하다
송갑석, 광주아픔 딛고 금배지로 부활하다
  • 박병모 기자
  • 승인 2018.06.14 11:0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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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유일의 민주당 국회의원...광주의 오월에서 '평화통일 선봉' 자임

[시민의소리 =박병모 기자] 30여 년 전이다.
87년 6월 항쟁의 선봉에서 ‘호헌철폐’ ‘독재타도’를 목청껏 외쳤다. 그러면서 그는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 만나자 판문점에서”라는 슬로건을 내걸었다.

▲광주 서구갑 송갑석 후보가 개표결과 당선이 확정되자 기뻐하고 있다.
▲광주 서구갑 송갑석 후보가 개표결과 당선이 확정되자 기뻐하고 있다.

12일 북미정상회담이 이뤄져 한반도에 평화분위기가 따스하게 전해지던 날. 그 옛날 학생운동을 하던 시절을 온몸으로 느끼며 가슴 벅찼던 순간을 회상하던 후보가 있었다. 다음날 6·13지방선거와 함께 치러진 국회의원 재보선에서 그는 광주의 아픔을 이겨내고 금배지를 거머쥐었다.
광주 서구갑 송갑석 당선자다.

그래서 그는 국회에 입성하면 통일의 선봉에 서는 국회의원이 되고 싶단다. 자신이 30년 전에 그토록 목놓아 외쳤던 통일 노래가 문재인 정부 탄생으로 무르익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포부와 값진 부활은 그가 걸어온 삶의 질곡과 아픈 상처를 떠올리지 않고는 상상할 수가 없다. 송 당선자는 서울 명문대 출신이 차지해왔던 전대협 의장을 고흥 촌놈에, 그것도 전남대 출신이 맡게 되면서 고난의 여정이 시작된다.

90년 전대협 출정식에서 마이크를 잡고 포효하고 있는 송갑석 당시 의장.
▲90년 전대협 출정식에서 마이크를 잡고 포효하고 있는 송갑석 당시 의장.

민주화의 봄을 갈망하던 90년, 광주 금남로 한복판에는 10만여 명의 광주시민들이 발디딜 틈도 없이 운집해 있었다. 노태우 정권타도를 한목소리로 목청껏 외쳤다. ‘이게 나라냐’며 전국방방곡곡에 일었던 촛불집회처럼 말이다.

집회 도중 갑작스런 웅성거림이 일었다. 한 순간의 쥐죽은 듯한 고요한 정적을 깨고 어느 누군가가 외쳐댔다. “송갑석 전대협의장이 나타났다...”

전국 대학생 운동권의 리더로 불리면서 수배자 몸이였던 송갑석 전대협 의장이 경찰의 포위망을 뚫고 광주의 심장부 금남로 집회에 갑자기 나타나자 집회분위기는 더욱 달아올랐다. 참가자 모두가 ‘송갑석 · 송갑석...’을 목청껏 연호하자 집회 현장을 막고 있는 경찰과의 충돌 분위기가 연출됐다.

필자는 당시 사회부 경찰 출입 기자로서 취재를 하면서 그 집회 현장을 지켜봤던 터라 지금도 당시의 송갑석의 모습이 뚜렷하다.

그렇게 신출귀몰하던 송갑석도 경찰에 붙잡혀 교도소에 수감된다. 90년 10월부터 자그만치 5년 2개월 동안 아까운 청춘을 감방생활로 바친 셈이다.

“감옥에서 나가려면 시키는 대로 불어라”는 회유와 압력에도 불구하고 송갑석은 늘 양심과 품위를 잃지 않았다. 독재정권에 맞서 거리로 뛰쳐나가 시위를 하던 중 자신의 몸을 불사르고, 최루탄에 맞아 죽고, 체포돼 고문당하던 동료 학생들이 떠올라 노태우 정권의 달콤한 유혹을 들어줄 수가 없었단다.
서약서를 끝내 거절하다 보니 송갑석은 형을 끝까지 마친 상태에서 만기출소를 할 수밖에 없었다.

감옥에서 사회로 나오고 나니 또 다른 20여년의 아픔이 기다리고 있었다. 적어도 정치역정에서 만큼은 말이다.
함께 학생운동을 했던 동료와 선·후배들은 국회로 진출해 금배지를 찼고, 선배인 임종석은 청와대 비서실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그는 교도소 생활에서도 그랬지만 민주화운동을 한 광주의 아픈 손가락이라고 해서 남의 도움 받는 것을 단호히 배격했다. 올곧은 성격 때문이다.

2000년대 젊은 피를 수혈한다며 김대중 정부 핵심실세로부터 국회의원 공천을 주겠다는 권유도 물리친 게 대표적인 사례다.막대기만 꽂으면 당선 되던 시절이라 시류에 편승했다면 그의 삶은 달라졌을 게다.
모처럼의 기회를 외고집 땜에 놓친 탓에 송갑석의 삶은 그야말로 어렵고 힘들었다.

2012년 민주당 여론조사에서 지지율이 높았음에도 불구하고 여성전략지역으로 묶이는 바람에 고배를 마셨다. 무소속으로 출마했으나 여의치 않았다.

4년 뒤 2016년 총선 때도 더불어민주당 경선을 통해 공천을 받아 우여곡절 끝에 출마했으나 새청년연합의 녹색돌풍에 휩싸여 무릎을 끊고 말았다.

이번 민주당 경선 과정에서도 자칫 기회를 놓칠 뻔 했다. 전략공천 한다는 소문이 나돌면서다.
민주당의 비민주적 행태를 보다 못한 시민들과 자원봉사자, 학생운동에 참가했다 사망한 부모까지 지원사격에 나섰다. 그런 드라마틱한 과정을 거쳐 송갑석은 광주 서구갑 재보선에 출마할 기회를 얻게됐다.

그렇다면 송갑석을 부활하게 만든 원동력은 뭘까.
처가살이를 할 정도로 변변치 않은 살림살이에도 사회와 정치를 바꾸고자 하는 열정만을 대단했다. 무엇보다 그는 자신을 이해해주고 더불어 나아가는 전국적인 자원봉사자의 힘이 컸단다.

20년 전 송갑석이 정치에 발을 디딜 때부터 줄곧 그를 도왔던 후배 이 모씨는 이번 재보선에도 어김없이 나타났다.
당락에 관계없이 그는 송갑석을 '형'이라고 부르며 어디라도 달려갈 태세다.
대학 다닐 때 송갑석 전대협 의장이 독재에 굴하지 않고 감옥에서도 소신을 굽히지 않는 학생운동 지도자였기에 그 매력에 흠뻑 빠졌다는 것이다.

송갑석은 이제 당선됐고, 30년 전에 주장했던 자신의 외침이 실현할 수 있는 기회가 남북정상회담으로 인해 열리게 됐다고 자신한다.

이제 국회의원이 된 만큼 닫혀진 개성공단을 활짝 열어 제치고, 50년 6월25일 전쟁이후 68년 만의 정전협정을 다시 체결하면서 남북이산가족이 자유롭게 만나고 왕래할 수 있는 점진적 평화통일 전략을 펼쳐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러면서 광주 서구발전을 위해 주요현안도 챙기고 사단법인 광주학교에서 매월 소외된 어린이들에게 ‘희망 케잌’을 전달하는 사회봉사활동도 더욱 늘려나갈 계획이다.

이제 송갑석은 유일하게 민주당 출신 국회의원이 됨에 따라 자연스레 광주시당위원장과 최고위원을 맡게 된다. 그만큼 책임감이 무겁다.

그 첫 번째 과제가 송갑석이 대선 후보시절 문재인 대통령에게 국정 100대 과제로 건의했던 광주공항 이전 공약이 제대로 추진돼 광주가 명실상부한 스마트시티로 거듭나는 게 아닐런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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