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의 호남 선비, 시조문학의 최고봉 고산 윤선도(11)
길 위의 호남 선비, 시조문학의 최고봉 고산 윤선도(11)
  •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 승인 2018.05.21 10:2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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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6년 12월 23일에 광해군은 윤선도를 외딴 섬에 안치하고, 양부(養父) 윤유기를 삭탈관직 하라고 전교했다. 그러나 후폭풍은 여전했다.

12월 26일에 홍문관은 사헌부․사간원 관원을 모두 복직시키고 윤선도의 상소에 대하여는 공론에 따르기를 청했다. 12월 29에 승정원은 상소에 대한 대신들의 의견을 광해군에게 보고했다.

“윤선도의 일을 대신들에게 의논하였더니, 영의정 기자헌은 ‘감기가 매우 심하여 일을 살피지 못하므로 삼가 성상의 재량에 맡깁니다.’라고 하였고, 우의정 한효순은 ‘윤선도의 상소를 신이 아직 보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 내용이 어떤지를 모르겠습니다. 윤유기가 지휘하였다는 것도 신은 역시 아직 듣지 못했습니다. 이와 같이 언로(言路)에 관계되는 막대한 일은 감히 가볍게 의논드릴 수가 없습니다. 성상의 재량에 맡깁니다.’라고 하였습니다.”(광해군일기 1616년 12월 29일)

이날 양사는 우의정 한효순이 ‘윤선도의 상소가 언로에 관련되는 막대한 일’이라고 한 것에 대하여 반발하여 전원 파직을 청했다. 이러자 광해군은 사직하지 말라고 하였다.

1617년 1월 4일에 일대 반전(反轉)이 일어났다. 유학 이형과 귀천군·금산군 등 종친 19명이 윤선도를 옹호하는 상소를 잇달아 낸 것이다.

먼저 유학 이형의 상소를 읽어보자.

“예조판서 이이첨이 위복의 권한을 마구 주무르고 있는데, 권세가 온 나라를 기울이고 위세가 임금과 같아서 사람들이 눈치만 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윤선도는 일개 서생으로서 종사가 위태로운 것을 목격하고는 감히 피를 토하는 상소를 올린 것입니다. 그러니 혈기가 있는 사람 치고 그 누가 고무되지 않겠습니까. (중략) 이이첨은 조금도 거리낌이 없이 더욱 더 흉악한 기세를 돋우고 있으며, 승정원과 삼사의 관원 및 반궁(泮宮)과 사학(四學)의 유생들은 오로지 이이첨이 있는 줄만 알고 임금이 있는 줄은 모르고 있습니다. (중략) 삼가 성상께서는 어리석은 신의 간절한 마음을 굽어 살피시고 윤선도의 충성스러운 말을 통촉하시어, 속히 이이첨이 흉한 죄를 다스리고, 삼사와 정원·관학이 악인을 편든 죄를 벌하여 종묘사직이 억만년토록 되게 하소서.”

같은 날 귀천군 이수· 금산군 이성윤·금계군 이인수 등 종실 19인도 이이첨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렸다

이 상소에는 “예조판서 이이첨은 간사하고 악독하며 괴팍하고 교활하여, 사당(私黨)을 널리 심고 충신들을 모두 내쫓았으며 국권을 농락하여 위세가 날로 성해지게 되었습니다. (중략) 아, 국세가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어찌 크게 걱정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초야에 있는 신하 윤선도는 강개하여 상소를 올려서 사람들이 감히 말하지 못하는 바를 감히 말하였습니다. (중략) 전하께서 윤선도의 일 때문에 대신들에게 수의(收議)한 것은 여론이 어떠한가를 알고자 해서였습니다. 그런데 삼사는 우의정 한효순을 공격하면서 여력을 남기지 않았으니, 역당을 비호하기를 어찌 이렇게 한단 말입니까. 지금 윤선도의 상소가 전하께 진달되었으니 이이첨이 국권을 농락한 죄를 성상께서 이미 통촉하시었을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속히 권간을 축출하여 종사를 안정시키고, 그 다음으로 삼사의 죄를 다스리소서.”라고 적고 있다.

이에 광해군이 답하기를, “상소의 내용은 모두 알았다. 다만 조정의 큰 원칙은 종척의 여러 경(卿)들이 간여할 일이 아닌데, 이렇게 번거롭게 아뢰니, 누구의 사주를 받고 이 상소를 올린 것인가?”라며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

이러자 1월 5일에 양사 관원들은 귀천군과 금산군의 상소를 비판하고 자신들을 파직하기를 청했고, 홍문관은 이형과 종친의 상소를 흉소(兇疏)라고 비난하면서 역시 파직을 청했다. 광해군은 또 사직하지 말라고 답했다.

1월 6일에 양사에서 귀천군·금산군을 절도에 위리안치(圍籬安置)하고 금계군 이하를 모두 삭탈관작(削奪官爵)하라고 상소했다. 이날 광해군은 귀천군과 금산군을 중도(中道)에 부처하라고 명하였다. 1월 7일에 양사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귀천군을 위리안치하라고 촉구하였으나, 광해군은 위리안치 할 것까지는 없다고 답했다.

한편, 1월 9일에 광해군은 가도사(假都事)에게 명하여 윤선도를 함경도 경원으로 압송하게 하였고, 1월 13일에 유학 이형을 먼 변방에 위리안치했다.

광해군 시대는 직언하는 이들은 모두 내쳐지고, 아첨하는 이들만 살아남는 세상이었다. 참으로 암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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