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가두방송 차명숙, 계엄군 만행 38년만에 입열다
5.18가두방송 차명숙, 계엄군 만행 38년만에 입열다
  • 김다이 기자
  • 승인 2018.04.30 15:1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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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박·회유·인권유린...혁시갑 채운채 한 달여간 짐승처럼 지내

5.18민주화운동 당시 가두방송에 나섰다 연행된 차명숙씨가 38년 만에 고문수사와 잔혹행위에 대한 진실을 폭로했다.

경남 안동에 거주하고 있는 차명숙씨는 30일 광주 시의회를 찾아 80년 그 날을 떠올리며 눈물을 참으며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지난 2011년 재심청구를 하면서 수감기록을 통해 잃어버린 기억을 더듬어 떠올리기 시작했다.

차 씨는 1980년 5.월 19일 계엄군의 무자비한 만행을 광주시민들에게 알리기 위해 가두방송을 했다. 그는 21일 계엄군의 집단 발포 이후 병원에서 부상자를 돌보다 505보완대로 끌려가게 됐다. 당시 고작 19세나이었다.

차명숙씨

차명숙 씨는 “아직도 언제 붙잡혔는지, 어느 병원에서 붙잡혔는지 정확한 기억을 되찾기 힘들다”며 “다만 보안대 지하로 내려가는 수많은 계단만이 희미하게 생각난다”고 입을 열었다.

505보안대에 끌려갔던 차 씨는 잔혹하게 고문을 당했던 기억을 하나둘씩 꺼내기 시작했다.

차 씨는 “여성들에게 가해진 고문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치욕과 조금의 인권도 보호되지 못했으며, 그 속에서 여성들은 끌려 온 하나의 물건처럼 취급되었다”며 “무릎을 꿇게 하고, 군화발로 밟아서 돌려도 신음소리 한 번 내지 못했고, 어린 여학생들을 상무대 책상위에 앉혀 놓고 물을 끼얹어 가면서 어깨가 빠지도록 몽둥이로 등을 두들겨 팼다”고 기억했다.

차명숙씨 또한 고문으로 인해 하얀 속옷이 까만 잉크색으로 변하도록 살이 터져 피를 흘리며 가혹한 고문을 받았다. 고문은 광주교도소로 이감되어서도 계속 됐다.

차 씨는 “80년 9월 어느날 교도관 세명이 들어와 영문도 모르는 나를 등 뒤로 수갑을 채우고 곤봉으로 끼어 양쪽으로 들고 나갔다”며 “수사관들은 이미 정해지 7가지 항목을 정해놓고, 죄목이 추가되면 사형이나 종신형까지 받을 수 있으니 자신들이 하라는 대로 시인하라고 협박했다”고 떠올렸다.

광주교도소에서 끔찍한 고문수사를 받은 이후에는 자살을 미연에 방지한다는 명목 하에 한 달 여 동안 혁시갑을 한 채 짐승처럼 지내도록 했다.

혁시갑은 수갑을 채운 손을 허리에 채워 둔 폭 10cm 두께 3cm의 가룩 허리띠에 24cm길이의 쇠사슬로 연결해 놓은 계구다.

당시 그는 “수갑을 양쪽 손목에 찬 채 먹고 자고 볼일까지 보면서 짐승만도 못한 상태로 지내야 했다”며 “38년이 지난 지금도 80년 5월의 기억과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울먹였다.

차 씨가 이날 공개한 수감기록에는 ‘불온언사 발언’이 기록돼 있었다. ‘나는 신문과 방송을 믿지 않으며 우리 한국 정부가 이렇게 해가지고는 절대로 통일이 될 수 없으면 박정희가 육영수 서거했을 때 그만두고 물러났으면 영웅이란 말을 들었을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김대중이를 간첩으로 몰아 죽이려고 하고 있다’, ‘이승만 대통령 살아있을 때 여수, 순천, 제주사건만 보더라도 우리나라는 똑똑한 사람은 다 죽이려고 했었다’는 등의 내용이 적혀 있다.

차 씨가 알지도 못한 내용들로 적혀있었던 것이다. 수감기록에는 당시 관련자로 조사교위, 보안교감, 보안과장, 부소장 등 결제라인 직인들까지 그대로 찍혀 있었다.

이날 기자회견을 통해 차 씨는 “5.18진상조사위는 80년 5월에 자행된 고문수사와 잔혹행위에 대한 진상을 철저히 조사하고 관련자를 처벌하라”며 “5.18민주항쟁을 연구하는 단체 및 연구자들은 역사적 진실을 후대에게 물려주기 위해 진실을 정확하게 기록하라”고 요구했다.

이외에도 “5.18관련단체들은 아직도 80년의 상처를 드러내지 못하고 이국땅에서 외롭게 숨어사는 여성들을 찾아내어 그들의 소중한 증언을 듣고 역사적 진실을 기록하라”고 호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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