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의 호남 선비, 시조문학의 최고봉, 고산 윤선도(7)
길 위의 호남 선비, 시조문학의 최고봉, 고산 윤선도(7)
  •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 승인 2018.04.09 10:1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윤선도, 「병진소」를 올리다

1616년(광해군 8년) 12월 21일,  겨울의 추위를 한 방에 날려버리고 조선 땅을 발칵 뒤집어 놓을 만한 상소 한 장이 승정원에 올라왔다.

추호의 망설임도 없이 당대의 권신(權臣) 이이첨(1560∼1623)의 전횡을 비판하는 상소를 낸 사람은 30세의 일개 진사(進士) 윤선도였다. 1) 

승정원은 상소문이 흉참하여 입계하지 못하고 있다고 아뢰자, 광해군은 즉시 들이라고 명했다.

"진사 윤선도가 상소를 올렸는데 그 상소를 살펴보니, 의도가 오로지 원이곤을 구제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훈척 중신들이 모두 모함을 당하였는데 말이 매우 흉참합니다. 마땅히 즉시 입계해야 하겠으나 우선 감히 입계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니, 즉시 들이라고 전교했다.(광해군일기 1616년 12월21일)    

그러면 윤선도의 상소문을 읽어보자. 1616년 12월 21일자 「광해군일기」에 전문(全文)이 실려 있다.  

"삼가 아룁니다. 신이 들은 바에 의하면, 임금이 아랫사람들을 통제하는 방도로는 권강(權綱)을 모두 쥐고 있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서경』에도 이르기를 ‘오직 임금만이 상도 줄 수가 있고 벌도 줄 수가 있다’고 하였는데 이는 참으로 뜻 깊은 말입니다.

신하된 자가 참으로 나라의 권세를 혼자 쥐게 되면 자기의 복심(腹心)을 요직에 포진시켜 상과 벌을 자기에게서 나오게 합니다. 설령 어진 자가 이렇게 해도 안 될 일인데, 만약 어질지 못한 자가 이와 같다면  어찌 나라가 위태롭지 않겠습니까.

지금은 훌륭하신 임금께서 위에 계시어 임금과 신하가 각기 자신의 직분을 다하고 있으니 이러한 자가 없어야 마땅하겠습니다만, 신이 예조판서 이이첨이 하는 짓을 보니 불행히도 이에 가깝습니다.

신이 삼가 보건대, 근래의 고굉(股肱 다리와 팔에 비길 만한 신하) · 이목(耳目 귀와 눈, 언론 담당 대간)·후설(喉舌 목구멍과 혀, 임금의 명령을 받드는 승정원의 승지)을 맡은 관원들과 논사(論思 홍문관)·  풍헌(風憲풍교와 헌장, 지방 향청을 담당하는 직임)·전선(銓選 사람을 뽑는 이조와 병조)을 담당하고 있는 관원들은 이이첨의 복심이 아닌 자가 없사옵니다.

그러므로 무릇 대각이 올린 글이면 전하께서는 반드시 대각에서 나온 것이라고 여기시지만 사실은 이이첨에게서 나온 것이며, 옥당이 올린 차자도, 전조(銓曹)의 인사추천권도 모두 이이첨에게서 나온 것입니다.

관학(館學)유생에 이르러도 그의 파당이 아닌 자가 없나이다. 그러므로 관학의 소장(疏章)이 겉으로는 곧고 격렬하지만 속은 실제로 아첨하고 빌붙는 내용입니다.

이와 같기 때문에 자기편이 아닌 자는 비록 사람들의 신망을 받고 있는 자라도 반드시 배척하고, 자기와 뜻이 같은 자는 사람들이 비루하게 여기는 자라도 반드시 등용합니다. 이렇게 그가 권세를 멋대로 부리는 것이 극도에 이르렀습니다.

그가 비록 보필(輔弼)의 임무를 맡은 지위에 있지는 않으나 전하께서 믿고 맡기셨다면, 그는 마땅히 나라에 충성을 다하기를 당(唐)나라의 이필이나 육지와 같이 해야 하는데, 도리어 나라를 저버리기를 이렇게 하니, 신은 통분스럽게 생각합니다.” 2)

이렇게 윤선도는 조정의 모든 일이 권신 이이첨에 의해 좌지우지(左之右之)되고 있음을 상소한다.  

한편, 윤선도의 상소에는 광해군 국정 8년간의 난맥상이 깔려있다. 광해군은 1608년 2월에 즉위하자마자 선조 재위 시 영창대군(1606∽1614)을 지지한 소북파 유영경을 죽이고, 2월 20일에는 형 임해군을 강화도로 유배 보낸 후 1609년 4월에 죽인다.

1613년 4월에 조령(鳥嶺)에서 상인을 죽이고 은을 강탈한 사건이 일어났다. 강도를 잡았는데 영의정 박순의 서자 박응서, 목사 서익의 서자 서양갑 등 일곱 명의 서자(七庶)였다. 이이첨은 박응서에게 접근하여 김제남(영창대군 외할아버지)이 역모했다고 자백하면 살려주겠다고 꼬였고, 박응서가 거짓 자백하자 계축옥사가 일어났다. 영창대군은 강화도로 귀양 가서 1614년에 증살(蒸殺)되었다. 1615년에는 능양군(훗날 인조)의 동생 능창군이 역모죄로 죽었고, 인목대비에 대한 폐모론이 대두되었다. 이 과정에서 정권을 잡은 대북파는 서인이나 남인, 소북파를 죽이거나 유배 보내는 등 극단적인 조치를 취했다.

1) 이이첨은 연산군 때 무오사화를 일으킨 이극돈의 후손이다. (인조실록1623년 3월 19일)  

2) 이필은 당 현종 등 네 임금을 모신 재상이고,  육지는 당 덕종에게 간언한 대신이다.

최신 HOT 뉴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