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 향 머금은 번안시조(67) 시자방(示子芳)
한시 향 머금은 번안시조(67) 시자방(示子芳)
  • 장희구 시조시인․문학평론가
  • 승인 2018.03.22 0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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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산벌들이 사람 좇고 향기 따라 날아드네

고시조를 한시로 옮긴 작품이 900여수 전한다. 태종의 하여가(何如歌)와 정몽주의 단심가(丹心歌) 등을 비롯해 많은 한시를 번안했다. 가람 이병기는 임억령의 시자방(示子芳) 한시를 시조로 옮기며 제목을 시우인(示友人)이라 바꾸었던 사례도 있다. ‘자방’이 누구인지는 모른다. 그가 바꾼 시조 원안은 다음과 같이 전한다. [절압 헤진꽃이 옷에 자주 부드친다 / 팔을 젓고 돌라올제 맑은 향긔 떠돌으며 / 저산의 수업는 벌이 멀리 나를 따르더라.(1925. 7. 8 : 동아일보)] 이를 재 번안해 본다.

 

示子芳(시자방) / 석천 임억령

오래된 절 앞에서 봄날을 바라보니

꽃잎은 비에 날려 무수히 옷에 앉고

소매에 묻은 향기에 산벌들이 날아드네.

古寺門前又送春      殘花隨雨點衣頻

고사문전우송춘      잔화수우점의빈

歸來滿袖淸香在      無數山蜂遠趁人

귀래만수청향재      무수산봉원진인

 

수많은 산벌들이 사람 좇고 향기 따라 날아드네(示子芳)로 제목을 붙어본 칠언절구다. 작자는 석천(石川) 임억령(林億齡 : 1496~1568)이다.

위 한시 원문을 번역하면 [오래된 절 앞에 봄날을 그렇게 보내는데 / 꽃잎은 비에 날려 무수히도 옷에 앉는구나 // 집에 돌아와도 소매 가득히 향기가 일어나니 / 수많은 산벌들이 사람 좇고 향기 따라 날아드네]라고 번역된다.

위 시제는 [벗 자방에게]로 번역된다. 원 시제는 시자방(示子芳) 또는 시우인(示友人)으로 되어 있어 [자방인 시우인에서 보임]으로 의역해 본다.

봄이 떠나는 옛 절 문에서 시인은 봄비에 젖어 숲을 걷는다. 비는 내리고, 걷는 옷깃 위로 자꾸 묻어나는 꽃잎. 이러한 겹쳐진 장면 속에 봄을 보내는 울적한 심사는 없다. 꽃잎이 묻은 소매이니 맑은 향기가 가득하고, 벌은 꽃으로 오인하여 잉잉거리며 쫓아온다는 시심도 일으킨다.

시인은 가는 봄에 져버린 꽃은 땅에 떨어지고 마는 것을 한탄한다. ‘내가 꽃이 되고 봄이 되어 벌을 몰고 돌아오는 것이다.’ 시인은 오래된 절 앞에서 또 봄을 보낸다. ‘또’에는 ‘헛되이’라는 의미가 배어 있다. 아름답게 피었다가 시들은 꽃에는 오래 묵힌 냄새가 물씬 난다. 꽃향기를 소매 가득히 담아 오니 벌들이 먼저 알고 몰려든 것이다.

화자의 옷에 떨어져 소매 가득 옛 절의 향기가 스며든다. 그 냄새와 함께 별들이 화자를 따라 산 아래로 내려왔다. 그는 분명 봄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온 것이다. 가지고 온 그 향기 그윽한 상큼한 봄을 ‘자방’이란 친구에게 자랑하고 싶었음이 분명해 보인다.

위 감상적 평설의 요지는 ‘절 앞 봄날 그렁저렁 꽃잎 날려 옷에 앉네, 집에 와도 소매 가득 향기 따라 사람 좇고’ 라는 상상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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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석천(石川) 임억령(林億齡 : 1496~1568)으로 조선 전기의 문신이자 문인이다. 임백령이 원종공신의 녹권을 보내오자 분격하여 이를 불태우고 해남에 은거했다. 임백령이 죽은 뒤에는 상경하여 동부승지와 병조 참지 그리고 강원도 관찰사, 담양부사 등을 역임했다. 정철의 스승이다.

【한자와 어구】

古寺: 오래된 절. 옛절. 門前: 문 앞. 又送春: 또 봄이 오다. 殘花: 꽃잎이 떨어지다. 隨雨點: 점점히 비를 따라서. 衣頻: 자주 옷에 앉다. 자주 옷에 묻다. // 歸來: (집에)돌아오다. 滿袖: 소매 가득히. 淸香在: 푸른 향이 남이 있다. 無數: 수많은. 헤아릴 수 없다. 山蜂: 산벌. 遠趁人: 멀리서 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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