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의 호남 선비, 시조문학의 최고봉 고산 윤선도(3)
길 위의 호남 선비, 시조문학의 최고봉 고산 윤선도(3)
  •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 승인 2018.03.05 1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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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선도(1587∼1671)는 8세 때인 1594년에 인생에 중대한 전환점을 맞는다. 강원도 관찰사를 한 작은아버지 윤유기의 양자로 입양되어 해남윤씨 가문의 대종(大宗)을 잇게 된 것이다.

서울 명동성당 건너편에는 ‘한국YWCA회관’이 있는데, 근처에 ‘윤선도 집터’라는 표시석이 있다. 1988년 12월 한국관광공사에서 세운 것인데 눈에 잘 띄지 않는다. 표시석의 글을 읽어보자.

윤선도는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시조작가이다. 그의 시조는 정철의 가사와 더불어 조선시대 시가의 쌍벽이라고 평가된다.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어부의 생활을 노래한 <어부사시사>와 물, 돌, 소나무, 대나무, 달을 다섯 벗으로 비유하여 지은 <오우가>가 유명하다.

그렇다. 고산 윤선도는 송강 정철(1536∼1593)과 더불어 조선시대 시가의 쌍벽이었다. 송강에게 사미인곡과 속미인곡이 있다면 고산에겐 오우가와 어부사시사가 있었다. 그런데 사미인곡과 속미인곡은 전라도 창평(지금의 담양군 창평면)에서, 오우가와 어부사시가는 해남 금쇄동과 완도 보길도에서 만들어졌다. 우리말의 조형성을 가장 아름답게 꾸민 두 대가의 작품이 모두 남도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 긍지를 느낀다. 전라도가 시가문학의 보고(寶庫)라는 점이 자랑스럽다.

아쉽게도 표시석 안내문에는 이곳이 명례방(明禮坊)으로서 해남윤씨의 종가인 윤유기의 집인데 윤선도가 양자로 입양되어 대종을 이었다는 글은 없다.

그러면 여기에서 해남윤씨 가문을 살펴보자. 홍우원이 쓴 윤선도 시장(諡狀) 첫 머리에는 ‘윤선도는 시조 윤존부의 16세손’이라고 적혀 있다. 윤존부는 고려시대 중엽의 인물로 보이고, 윤선도의 고조부 어초은 윤효정(尹孝貞 1476∼1543)때에 이르러서 해남윤씨는 해남에서 사족(士族)의 길을 가게 된다. 강진 덕정동에 살고 있던 윤효정은 금남 최부(崔溥 1544∼1504)에게 글을 배우기 위해 해남에 왔다. 『표해록』으로 유명한 최부는 강직하고 청렴한 선비였는데 해남이 처향이었다.

그의 호 금남(錦南)도 최부가 태어난 금성(나주의 옛 지명)의 ‘금(錦)’과 처가인 해남의 ‘남(南)에서’ 한 자씩 따온 것이다. 안타깝게도 최부는 김종직(1431∼1492)의 제자로 붕당했다는 이유로 1498년(연산군 4년) 무오사화(戊午士禍)때 함경도 단천으로 유배를 가서 1504년 갑자사화(甲子士禍)때 참형을 당했다.

한편 윤효정은 해남의 대부호인 호장(戶長) 정귀영의 사위가 되었고, 당시 자녀 균분 상속의 관례에 따라 그의 부인은 시집오면서 막대한 재산을 가져왔다. 윤효정은 이 재산을 바탕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했고 국부(國富)의 지위에 오를 수 있었다. 그는 백련동(지금의 연동)에 터를 잡고 살면서 가업을 일으켰다. 윤효정은 6남(윤구 · 항 · 행 · 복 · 후 · 종)을 두었는데, 윤구· 윤행 · 윤복 세 아들이 문과에 급제하는 등 가문이 크게 번창했다. 1)

귤정 (橘亭) 윤구(尹衢 1495∼1549)는 윤효정의 장남이자 윤선도의 증조부이다. 그는 1516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예조정랑에 이르는 등 엘리트 코스를 밟았으나 1519년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영암으로 귀양 왔다. 윤구는 3남(홍중, 의중, 공중) 1녀를 두었고, 윤의중(1524∼1590)은 윤선도의 조부로서 대사헌 · 형조판서 등을 하였다.

윤복(1512∼1577)은 1565년에 안동도호부사를 하였고 이후 충청도관찰사를 했다. 그는 퇴계 이황과도 교류했으며 강흥 · 흠중 · 단중 세 아들과 외조카 문위세를 이황에게 보내어 수학케 했다. 이를 계기로 문위세의 매부 죽천 박광전이 1566년 겨울에 안동 도산서당에 가서 이황에게 공부를 배웠다.

한편 윤항(윤효정의 차남)의 아들 윤관중은 『미암일기』를 남긴 미암 유희춘의 사위가 되었는데 유희춘은 최부의 외손자이다.

그러면 윤선도는 어떻게 해남 윤씨 대종이 되었을까? 해남 윤씨 집안은 윤효정 – 윤구 - 윤홍정으로 종가가 이어졌는데 윤홍정은 아들이 없었다. 그래서 윤의중의 둘째 아들 유기를 입양하여 후사로 삼았다. 기묘하게도, 윤유기 역시 아들이 없었다. 그래서 윤유심의 둘째 아들 윤선도가 윤유기의 양자가 되었다.

윤선도 집터 표시석은 명동성당 바로 앞 YWCA 부조 옆에 있다.

1) 고미숙 지음, 윤선도 평전, 한겨레출판, 2013, p 3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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