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도의 멋을 찾아서(43) 광주무형문화재 제11호 판소리고법 감남종
남도의 멋을 찾아서(43) 광주무형문화재 제11호 판소리고법 감남종
  • 김다이 기자
  • 승인 2018.03.01 10: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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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 흐름 꿰뚫는 ‘판소리고법’의 미학
해남서 배워 80여년 외길 인생 걷다

바늘 가는데 실 간다는 말처럼 소리를 하는 명창 옆에는 북치는 고수가 늘 함께한다. 어느 한 쪽이라도 없으면 제 역할을 할 수 없어 서로에게 없어서는 안 될 존재이다.

판소리도 사람의 음성별로 다양한 특성과 기교가 다르듯이 판소리고법도 북채를 누가 잡느냐에 따라 명창이 제대로 소리를 뽑아낼 수 있을지, 소리를 그만 할지의 여부가 달라진다고 한다.

76년간 북과 한 몸으로 움직이며 북채를 손에서 놓지 않고 있는 이산 감남종(88) 명고는 판소리고법에서 가장 기본 중에 기본을 중요하게 여긴다.

건강이 좋지 않아 거동이 불편한 감남종 선생은 기자를 자택으로 초대해 생강차를 건네며 80여 년간 걸어온 본인의 판소리고법 인생 이야기를 풀어냈다.

어린 시절부터 귀 호강으로 접해온 국악

“고수가 앞질러 가면서 북을 제대로 쳐줘야 소리꾼이 제대로 할 수 있는 것이지. 명창은 고수를 잘 만나야 명창답게 할 수 있는 것이야”

그의 목소리는 아직도 중년의 목소리처럼 쩌렁쩌렁 멀끔하지만, 그의 신체는 자연의 순리대로 흘러가듯 세월을 따라가기 힘들어 보였다. 감남종 선생의 단단한 목소리 유지 비법은 아마 목소리에 좋은 생강차에 있는 듯했다.

광주광역시 무형문화재 제 11호 판소리고법 예능보유자 감남종 선생은 어린 시절부터 한 평생을 판소리고법과 함께해왔다. 1931년 전남 해남군 대흥사 인근에서 태어난 감남종 선생은 어린 시절부터 유복하게 자라왔다고 한다.

감남종 선생의 아버지는 대흥사 주지로 있었고, 당시 일본인을 제외한 동네에서 가장 부자 집안이었다. 1930~40년대만 해도 짚신을 신고 다니던 시절. 감 명인은 어린 시절부터 운동화를 신고 다녔고, 자전거를 타고 다닐 정도였다.

감남종 명인은 “어린 시절 7~8세 무렵부터 국악이 좋았다. 읍, 군에도 없던 축음기가 집에 있었고, 노래를  자주 들을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며 “대흥사는 국악인들이 들어와 산 공부를 하고, 심신을 달래던 곳으로 어린 시절부터 소리를 접할 기회가 많았다”고 떠올렸다.

해남에서 ‘애기명고’로 유명세 타기도

그렇게 4월 초파일이 되면 매년 대흥사에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소리 잔치판이 됐다. 감남종 선생은 어린 시절부터 귀 호강을 하고 살아온 것이었다. 그는 12살의 어린 나이에 임방울 선생의 소리를 감상하게 되면서 “나도 저렇게 소리를 할 수 없을까?”라고 감동을 받았고, 곧장 소리를 하겠다고 달려들었다.

감남종 명인은 “어머니께 소리를 하겠다고 말하니 단박에 무당들이 하는 것이라며 하지 말라고 반대를 하셨다”고 회고했다. 하지만 감 명인은 소리에 대한 열망을 버리지 않았다. 그는 이듬해 또 다시 소리판에 가서 북 치는 고수에 빠지게 됐다. 명창의 소리에 맞춰 재미있게 북을 치는 모습을 보고 매료되어 버렸다.

이후 “다시 부모님께 북을 배워보겠다고 하니 소리를 하겠다고 할 때와 달리 반대를 하지 않으셨다”며 “그때 당시 임방울 선생의 지정고수로 설장구가 특기였던 고명진 선생에게 북을 배우기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임방울 선생의 지정고수였던 고명진 문하에서 북의 기초를 틈틈이 익혔다. 다행히 고명진 선생은 이웃집 사람으로 친구의 아버지이기도 해 집안의 반대가 심하지 않았을 터다.

그렇게 감남종 선생은 어린나이부터 어디서든 북을 매고 다녀, ‘애기명고’라는 수식어가 따라붙어 다녔다. 광주동중학교(현 광주고등학교)를 다녔던 터라 방학이면 늘 해남 본가로 내려가 북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감남종 명인 제공
감남종 명인 제공

화려한 기교 뺀 ‘뼈다귀만 쳐라’의 가르침

해병대를 전역하고 난 이후에는 다시 해남으로 내려가 여러 소리꾼들 마주하고 지냈다. 그는 “대흥사 교원의 총무로 일을 하면서 산으로 공부를 하러 온 국악인들을 만나곤 했다”며 “이때 이들은 대흥사에 북치는 사람이 있는지 파악하면서 나에게 연습 좀 시켜달라는 요청이 들어왔고, 실전으로 북을 치다 보니 더 실력이 늘게 됐다”고 말했다.

그러던 어느 날 보성에서 해남으로 ‘북 선생’이 왔다는 소리가 돌았다. 명고 중에 명고였다. 감 명인은 단숨에 대흥사를 찾은 김명환 선생을 찾아가 “북을 배우고 싶다”는 의중을 밝히고, 본격적으로 판소리고법에 몰두하게 됐다.

판소리고법은 소리에 따라 추임새로 흥을 돋우고, 북으로 소리의 빈자리를 메우며 자연스럽게 소리꾼의 소리가 연결되도록 하는 역할을 한다.

감남종 선생은 “김명환 선생이 배운 대로 숨김없이 북을 쳐보거라 해서 시험을 보다시피 기교를 부리면서 북을 쳤었다”며 “그런데 웃으시면서 ‘뼈다귀만 쳐라’라는 말을 하셨다. 화려한 기교로 쓸데없는 살을 붙이지 말고, 소리를 뺄 때는 빼라는 말이었다. 너무 부끄러웠다”고 떠올렸다.

28살 나이에 김명환 선생을 만나 4년 여간 해남에서 판소리고법을 제대로 익히고, 그에게 명고의 길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후 대흥사를 떠난 김명환 선생은 한국 최초 판소리고법으로 문화재로 선정되기도 했다.

판소리 고법, 기본 중에 ‘기본’ 가장 중요

그는 한 평생 판소리고법으로 호흡이 가장 잘 맞았던 명창으로 “소리꾼이자 나의 안사람인 이지오 씨라고 생각한다”며 “목포에서 만나 결혼을 하게 되면서 국악의 세계로 좀 더 깊이 들어갈 수 있다는 자신감이 들었다”고 말했다.

이후 판소리고법 예능인으로 감남종 선생은 여러 차례 전국고수대회에서 수상경력을 올렸고, 1995년 광주광역시 무형문화재 판소리고법 보유자로 이름을 올리게 됐다. 감 선생은 각종 고수대회 심사위원을 하면서 제자들을 길러내는 후진 양성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그는 제자들에게 무엇보다 기본 중에 ‘기본’을 가장 중요하게 가르치고 있다. 가장 기본 장단인 중모리, 중중모리, 진양조부터 제대로 하기를 강조해왔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자진모리, 휘모리, 엇모리, 엇중모리를 따라갈 수 있다고 한다.

감남종 명고는 “고수가 서툴게 북을 치면 명창이 소리를 하지 못 한다”며 “그만큼 고수의 역할이 중요하다. 소리를 죽일 수도 있고, 살릴 수도 있다”고 강조했다.

76년간의 세월동안 북과 함께 판소리고법 외길 인생을 살아온 그는 나름대로 한길로 인생을 잘 살아왔다고 자부한다. 마지막으로 바람이 있다면 한 명이라도 더 젊은 사람들을 제대로 가르쳐 판소리고법을 널리 알리고자 하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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