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도의 멋을 찾아서(41) 국가중요무형문화재 제53호 채상장 서신정
남도의 멋을 찾아서(41) 국가중요무형문화재 제53호 채상장 서신정
  • 김다이 기자
  • 승인 2018.01.16 17:4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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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제품의 꽃, 비단 대나무실로 전통을 엮다

죽제품 중에 으뜸으로 손꼽히며, 최고의 숙련된 기술을 갖춰야만 만들 수 있는 채상(彩箱).

채상장이란 얇고, 가늘게 쪼갠 대나무 껍질에 여러 가지 색을 물들여 다채로운 무늬를 엮는 기술을 가진 장인이다. 죽제품의 고장 전남 담양에는 다양한 죽제품들이 많지만, 그중에서도 단연 최고의 기술은 채상을 만드는 일이라고 한다.

죽세공예품의 최고 정수라고 가히 말할 정도다. 채상은 궁궐이나 양반가에서도 재정이 갖춰진 사람들이 쓸 수 있었다.

채상은 부잣집 처녀가 시집갈 때 혼수를 담아가거나 양반가 규수들이 귀중품을 보관하는 함으로 사용했으며, 어염집 아낙들의 반짇고리, 봉물을 담아 보내는 용도로 귀하게 쓰던 물건이었다.

채상은 궁중과 사대부가에서도 애용되었던 고급공예품이었다. 담양 향교 입구에 위치한 채상장 전수관에서 국가중요무형문화재 제53호 서신정(58) 장인을 만나 채상에 관해 더 깊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녹록치만 않은 죽물작업 채상 기술

단순히 상자나 함으로만 생각했던 채상은 서신정 장인의 손길을 만나 현대적인 생활용품으로도 변신했다. 채상기술로 엮은 부채, 모빌, 가방, 쿠션, 가구 등 다양한 작품을 탄생시켰다.

서신정 장인은 유년시절 집안에 아버지의 외할머니께서 물려주신 유산으로 고운 바구니가 있었던 것을 떠올렸다. 그때 당시 “아버지가 죽물 일을 해야 하는데 가장 재료는 적게 들면서 고급스러운 물건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하시다 채상 일을 하기 시작하셨다”며 “타고난 손재주가 있으셨던 아버지는 독자적으로 채상을 보면서 연구하셨다”고 말했다.

하지만 채상을 만드는 일은 녹록하지 않았다. 채상을 만드는 일을 아버지 혼자 하면서 고생만큼 돈을 벌지 못했기 때문에 살림은 풍족할 수 없었다. 죽물쟁이는 ‘죽’만 먹고 산다는 속된 말이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어린 시절부터 몸이 연약했던 서 장인은 19살 겨울 무렵 툇마루에서 채상을 짜고 있는 아버지의 모습이 처음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렇게 아버지에게 기본 짜기를 배우면서 채상의 재미를 붙인 서 장인은 본격적으로 채상 일을 돕게 되었다.

오로지 천연염색만으로 대오리 제작

20대 초반부터 다양한 문양을 만드는 작업을 개발해 아버지와 함께 채상을 만들어가면서 가세도 피기 시작했다고 떠올렸다. 채상은 담양 대나무로 만든 것이 제일 강하고, 질기면서 윤기가 반지르르하게 돈다고 한다.

서 장인은 “동남아 쪽 대나무는 아열대 기후 속에 자라 푸석푸석 하지만 오로지 담양 대나무는 윤기도 나면서 가장 튼튼하다”며 “채상은 왕대나무를 쓴다. 왕대나무는 부드럽고 대나무를 실처럼 나눌 때 몇 가닥이 추가로 더 나온다”고 설명한다.

처음 대나무를 가지고 쪼개는 작업을 하는 대반치기를 한다. 대를 썰고 나서 조름칼로 일정한 간격으로 자르는 조름 빼기를 한다. 그렇게 뺀 얇은 대나무를 입으로 물고 엷게 4~5개로 뜨기 시작한다. 이때 채상을 만드는 작업 중에 가장 숙련이 돼야 할 수 있는 작업이 입으로 엷게 뜨는 작업이라고 한다.

이후 대오리(대실)가 만들어지면 천연염색 작업을 시작한다. 대나무를 알록달록 물들게 하기 위해선 반복적인 작업이 필요하다. 서 장인은 쪽풀이나 치자 등 오로지 천연염색을 통해 오방색의 대오리를 만들어 놓고, 채상 짜는 작업을 시작한다.

100% 손작업으로 완성시키는 수제품

먼저 밑바닥부터 채상을 짜기 시작해 높이를 조절하고, 다양한 무늬가 들어간 겉 상자를 만들어 놓는다. 이때 채상은 얇고 부드러운 대나무로 짜기 때문에 한 겹으로는 튼튼하지 못해 겉 상자에 비슷한 크기의 속 상자를 만든다.

겉 상자와 속 상자가 만들어 지면 두 상자를 포개서 텟 대를 둘러 고정시킨 후 비단이나 삼베를 발라 감싸 테두리를 완성시킨다. 빨리 닳기 쉬운 모서리 부분에도 비단을 붙여 완성시키고 나면 100년 이상을 쓸 수 있는 채상이 탄생한다.

서신정 장인은 “채상은 처음부터 끝까지 100% 핸드메이드 작품이다”며 “돈이 된다면 가품이든 뭐든 다 만들어내는 중국에서도 채상만큼은 손으로 작업한 고생만큼 이윤을 내기 어렵기 때문에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다”고 자부심을 더해 이야기 했다. 그만큼 죽세공예품 중 최고의 꽃으로 꼽히며, 가장 하기 어려운 취약종목이라는 말이다.

채상은 죽제품이 단절될 위기에 처하자 정부가 1975년 국가중요무형문화재 제 53호로 지정하고, 초대 기능보유자로 故 김동연 선생, 2대에는 서신정 장인의 아버지 故 서한규 선생이 맥을 이어받은 이후 2012년 서신정 장인이 보유자로 인정되어 채상의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세계무대에 채상의 아름다움 전파하고파

서 장인은 “저도 어렸을 때 아버지를 도와드리면서 한 것처럼 채상 일은 가내수공업으로 할 수밖에 없다”며 “고가인 채상의 판매율은 높지 않기 때문에 인건비를 충당하면서 운영하기가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고 토로했다.

다행히 지난 2006년 문화재청과 담양군의 지원으로 지어진 채상전수관에서 채상에 대해 널리 알리고 있지만, 전기세 정도만 지원되는 군 지원금으로 수많은 관광객, 방문객들을 맞이할 인력의 인건비를 충당하기 어렵다고 한다.

그는 “고가인 채상은 관광객들이 선뜻 구매하기 어렵기 때문에 부담 없이 구매할 수 있는 죽제품이나 관광 상품을 판매해 운영하고 있다”며 “담양향교 앞에 있어 많은 관광객들이 찾아오지만 주변에 있는 죽세공예품을 파는 상점들과 오랜 마찰이 있었다”고 토로했다.

현재 서신정 장인 곁엔 채상장 전수조교로 남편이, 그리고 대를 이어 가업을 계승하기로한 아들이 함께 하고 있다.

세계적인 무대에서 담양 채상의 아름다움과 명성을 널리 알리고 싶다는 서 장인은 “세대가 바뀌면서 현재 담양사람들도 90%가 채상을 몰라 홍보를 열심히 하고 있다”며 “전수관에서 채상을 만드는 체험프로그램 운영으로 더욱 홍보에 매진해보려고 한다. 그리고 채상 작품들을 보여주는 작은 박물관이 들어섰으면 좋겠다”고 작은 소망을 꿈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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