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술년 새해 아침에
무술년 새해 아침에
  • 정규철 인문학연구소 학여울 대표
  • 승인 2018.01.01 1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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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규철 인문학연구소 학여울 대표
정규철 인문학연구소 학여울 대표

언제부턴가 새해 아침이면 해돋이를 보러 가는 사람들이 급격히 늘었다. 예로부터 ‘일 년 계획은 봄에 세워야 한다(一年之計 在於春)’는 말이 있는데, 동해에서 솟아오르는 해를 보면서 한해를 설계하고 새롭게 다짐해보는 것도 좋은 일이다.

먼동이 트는가했더니 어느새 날이 밝고 동녘하늘이 붉게 물들면서 해가 솟아오른다. 해 뜨기가 무섭게 들로 나갔다가 서산에 지면 돌아오는 것이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이다. 하지만 시골살림은 보통 사람들의 일상과 달리 일월성신(日月星辰)의 운행에 민감하다. 시기를 놓치면 실농(失農)할 수밖에 없는 것이 농사다. 지금은 과학영농이 주류를 이루고 있지만 시화연풍(時和年豊)에 기대 살던 시절 농사꾼들은 하늘과 땅과 바람, 그리고 천지만물의 눈치를 살펴야 했다.

농부에게 삶은 경작이다. 밭 갈고 씨 뿌리고 거두면서 자연과 교감한다. 자연 조건에 따라서 풍흉이 있을 수 있지만 자연의 변덕 앞에서는 그저 그러려니 한다. 천체 가운데 우리가 숨 쉴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 지구인 바에야 더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지구의 나이가 46억 년 쯤 된다고 하니 길어야 한 백년 우리네 인생인데 뭐 그리 대단한 존재라고 음모와 책략과 허위의식에 휘둘려서야 되겠는가. ‘콩 심는데 콩 나고 팥 심는데서 팥 난다’는 건 평범한 진리다. 한여름 논을 매는 손은 말랑말랑한 흙이 간지럽게 하고, 벼이삭의 향기에 취해 고된 줄도 모른다. 그들의 휴식은 삼동(三冬)에 있다. 장작불로 뜨끈뜨끈하게 달궈진 구들장 아랫목은 행복한 삶의 공간이다. 엄동설한에 북풍이 휘몰아쳐도 끄떡하지 않는다. 아무리 무서운 동장군이라도 동남풍 앞에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지 않던가.

예전에는 시골 마을마다 개 짖는 소리가 요란했다. 어두운 밤 길손들은 개 짖는 소리를 듣고 인가를 찾아 들었다. 개는 농가의 여름살이를 위해 집집마다 한두 마리 씩은 길렀다. 소나 개, 돼지, 닭은 잡아먹기 위해 사육했다. 가끔 호랑이가 출몰하여 물고 가기도 했지만 만도리(볏논의 마지막 김매기)가 끝나면 개를 잡아 보양했다. 사오십 명이 모이면 너댓마리를 잡아 물가에 무쇠솥 걸고 삶는다. 보리술 담아 증유한 소주 한잔에 삶은 고기 안주는 기가 찼다. 햇볕에 타서 껍질이 벗겨진 등이 온통 진물진물한데 아니 먹고 어쩔 것인가.

일제가 태평양전쟁을 일으키면서 조선에서 군수용 물품을 약탈해갔다. ‘개토벌’도 그 중 하나다. 이로 말미암아 동네마다 개 짖는 소리가 사라졌지만 다행히 개는 번식력이 좋아서 한국전쟁 후 정상복원 되었다.

뒤돌아보면 선열 앞에 부끄럽고 죄스러운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일부 지식인들이 나라와 겨레를 배신하고 친일주구(親日走狗)가 된 것은 아무리 생각해 봐도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들의 잘못된 선택은 두고두고 우리 겨레의 가슴앓이로 남아있고, 분단의 고통은 천형처럼 무거운 멍에가 되고 있지 않는가.

1923년 9월 1일 일본 동경 횡빈(橫濱)을 중심으로 주변 일대에 큰 지진이 일어났다. 일본인들은 그 지방을 관동(關東)지방이라 불렀기 때문에 그 지진을 「관동대진재」라고 한다. 이 지진으로 말미암아 동경시의 3분의 2가 잿더미가 되어버렸다. 이때 우리는 조선총독부 밑에서 굴욕적인 삶을 이어 간지 13년, 3.1운동 4년이 되던 해였다. 그러면서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애국지사들이 만기로 출소하였고, 기미독립선언을 주도했던 양한묵 선생은 모진 고문으로 옥사하던 시기였다. 지진이 나자 일본인들은 난데없이 ‘조선 사람들이 도둑질하며 불 놓고, 우물에 독약치고 다니며 폭동을 일으키려 한다.’고 하면서 마구 죽였다. 소위 「조선인 대학살사건」이 그것이다. 공장지대나 변두리 빈민가에 거주하면서 막노동으로 그날그날 연명하던 가난하고 무지한 조선인들은 무슨 영문인지도 모르고 끌려가 죽임을 당한 것이다. 이른바 거품을 문 왜놈들은 ‘조선놈사냥’에 혈안이 되어 날선 일본칼(日本刀)과 대창 등을 마구 휘둘러 남녀 할 것 없이, 어린이를 비롯하여 만삭이 된 여자들까지 찔렀다. 이처럼 잔혹하고 천인공노할 만행을 저지른 일제는 당시 공산주의자들의 움직임을 예의 주시하면서 혹여 혁명이라도 일으키지 않을까 하는 우려에서 조선인을 희생양으로 삼았다고 한다. 더욱 놀라운 것은 학살당한 우리 동포의 참혹한 시신을 운반, 소각 처리하는 일을 우리 동포들에게 맡겼으니 생각하면 할수록 치가 떨린다.

관동대지진의 참상이 전 세계 언론의 주목을 받으면서 미·소 양국은 구호물자를 싣고 동경만에 도착하였다. 이때 조선에서는 미묘한 기류가 흐르고 있었다. 이상재, 윤치호 등 기독교도들이 중심이 되어 종로 YMCA 회관에서 모임을 갖고, 일본진재민 구호물품 모금에 나섰던 것이다. 모금의 취지는 ‘일본인들이 무고한 우리 동포들을 학살하였다 하더라도 우리는 원수를 은혜로 갚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당시는 총독부가 전국 각지에서 곡식이며 물자 할 것 없이 강제로 수탈하고 있었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이런 와중에 일부 몰지각한 자들이 총독부 사주 아래 조선인 부랑자나 또는 일정한 직업 없이 떠도는 일꾼들을 규합하여 친일우익 노동자 단체를 만들었다. 그 단체의 명칭은 「상애회(相愛會)」로 그 중심에 박춘금(朴春琴)이라는 자가 있었고, 총독부 경무국장을 지낸 동경경시청감이 그 배후에서 조종하면서 단순 노동자들의 고혈을 빨았다.

민족사의 어두운 골목에는 언제나 추악무비한 그림자가 따랐던가 보다. 해방이후 재일동포는 어림잡아 60~80만으로 추산되었다. 그들은 일본에 잔류하면서 지금까지도 제대로 된 사람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겨레의 한 맺힌 응어리는 끝내 풀 수 없는 것인가.

정치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은 심각한 자기반성이 있어야 할 것이다. 국민의 입장에서 억울하고 분한 생각이야 많지만 한일 간에 얽히고설킨 난제들을 슬기롭게 풀어가는 것 말고는 아직은 다른 대안이 없는 것 같다. 탄핵 이후 문재인 정부가 적폐 청산을 위해 온 힘을 쏟고 있는데 무슨 억하심정이라도 있는지 사사건건 정부의 발목을 잡고 흔들어 대는 꼴이라니! 걸핏하면 ‘우파’가 어떻고, ‘친북좌파’ 운운하면서 분단의 논리를 펴는 것은 그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정치가는 모름지기 국민에게 꿈과 희망을 줄 수 있는 비전을 제시하여야 한다.

DJ 정부가 표방했던 남북간 화해와 협력은 아직도 유효하다.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미·소 양국체제 하에서 전 세계 국가들이 이념을 둘러싸고 갈등하거나 군비 경쟁에 몰두했던 소리 없는 전쟁, 즉 냉전(cold war)이 지금도 한반도에서 재현되고 있는데도 남북관계를 대결구도로 가지고 가는 것만이 보수 정당의 존재 이유인양 설쳐대는 짓은 이제 그만 그쳐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좀 더 거슬러 올라가 보면 이런 현상의 뿌리가 어디에 있었던 것인지 어렴풋이나마 알 것 같다. 이해득실을 저울질하면서 양지쪽만 찾아다니는 군상들의 행렬이 끝없이 이어지고 있지 않은가.

예컨대 개항시기 한국 최초의 일본 유학생 유길준의 경우를 들어보겠다. 동경 유학길에 나선 유길준은 경응의숙(慶應義塾)에 입학하였다. 설립자인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는 일본의 문명 개화론자이며, 정한론자로도 알려진 사람이다. 그의 저서인 「서양사정(西洋事情)」은 이후 유길준의 「서유견문」 저술에 영향을 줬다. 또한 당시에 일본에서 널리 익혀진 가토 히로유키(加藤弘之)의 「입헌정체략」을 읽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여기서 유길준의 생애를 깊이 언급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역사 인물은 공과가 있기 마련이어서 보호국 시기 그의 활동을 하나만 들겠다. 유길준은 이토 히로부미의 ‘자치육성정책’을 배경으로 일본의 한국병합을 지연시키려 했으나 그의 의도는 빗나가고 말았다. 이토의 조선 침략을 그 누구도 막을 수는 없었다. 1909년 ‘이토 사살’ 사건이 발생하자, 그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는 사건 이후 바로 이완용 등 고관들과 함께 사건 현장으로 달려갔고, 또한 ‘이토’의 국장에 조문차 동경으로 날아갔다. 아마도 안중근 의사의 쾌거가 그의 안중에는 없었던 모양이다.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일본에 의지하고자 하는 욕망을 버리지 못하였다. 일본자본주의를 모델로 한 ‘조선근대화’의 꿈, 그것은 산업사회로 진입한 일본이 상품시장과 원료공급지로서 조선의 식민지화가 필수였는데 그들의 의도를 제대로 간파하지 못한 것이다.

1919년 3.1운동 100주년이 1년 앞으로 다가오고 있다. 겨레의 대의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지 고민해 본다.

일제 강점기 민족 시인들의 뇌리에는 ‘반제(反帝)’ 투쟁이 박혀 있었다. 20세기 한국의 시인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인지, 1980년에 발표된 정희성 시인의 시를 읽으면서 이 글을 맺는다.

 

우리들의 그리움은

정희성

 

우리들의 믿음은

전쟁이 지나간 수수밭

죽은 내 형제의 머리맡에

미군이 벗어놓은

군화 속에 있지 않고

 

우리들의 소망은

끝끝내 결재되지 않을

보수정당의 서류함에 있지 않고

 

우리들의 사랑은

알 수 없는 기도와

못 다한 노래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아직도 우리들의 물음은

이 봄에 생생하게 피어날

보리밭에 있고

 

시퍼렇게 시퍼렇게

물어뜯긴 선창과

파리하게 떨고 있는 공장의

캄캄한 불빛 속에 있어

 

우리들의 사랑은 다시금

순환하는 계절의 저 눈 밭에

봄이 와서 붉게 피어날 진달래와

참호 속에 얼어붙은 젊은 기침과

돌이킬 수 없는 절망 속에 싹터

 

그리움은 이다지도

시퍼렇게 멍든 풀잎으로

너와 나의 가슴속에 수런대는가

오오 민주주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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