돼지고기와 주춧돌
돼지고기와 주춧돌
  • 시민의소리
  • 승인 2002.04.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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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사는 한치는 첩첩산중이라 멧돼지가 많이 살고 있습니다.
사실 내 눈으로 산자락을 우지끈 내달리는 멧돼지를 본 적은 없습니다. 아직 뭇 생명들의 삶의 터전인 주위의 산들을 천천히 걸어 살피며 식물, 동물들과 다정한 인사를 나누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토끼나 노루, 온갖 산나물과 나무들은 쉽게 만날 수 있지만(물론 여기에도 사려깊은 마음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지요)멧돼지와는 무척 힘들다고 합니다.
멧돼지란 녀석은 가까이 사람의 냄새가 나고 발자국 소리가 들리면 먼저 스스로 그 자리를 피한답니다. 아마도 뭔가 조심스러운 천성도 있겠지만 인간이란 독종에게 당해오며 터득한 삶의 지혜가 아닐까 생각이 듭니다.

이리 보기 힘든 멧돼지를 일 년에 한 번씩 만나는 연례행사가 우리마을에는 있습니다. 옆 집 사시는 우산아재가 국사봉 골짜기에 논농사를 지으시는데 벼가 익을 때쯤이면 멧돼지 식구들이 자주 내려와 가족운동회를 신나게 하는 바람에 벼농사를 망치는 경우가 종종 생긴답니다.
그래서 언제부턴가 우산아재는 올가미를 놓아, 해마다 한두 마리를 잡는 모양입니다. 어떤 해는 올가미에 걸린 어른 멧돼지가 아직 죽지 않고 있어 우산아재와 철애아재가 끔찍하게도 몽둥이로 내리쳐 실신시켜 잡아온 적도 있었답니다. 이런 날이면 어김없이 마을 사람들 모두가 멧돼지 고기를 먹는 잔치날이 됩니다.

사람냄새만 나도 자리 피하는 멧돼지
한치에선 해매다 한두마리 잡아 잔치를


ⓒ문충선
그런데 잡혀서 마을 사람들 입맛을 돋군 멧돼지는 그냥 재수없는 녀석일뿐일까요. 조금 재미있게 생각해 보면 일 년 내내 일하느라 고생한 마을 사람들에게 따뜻한 몸 보시를 해준건 아닐까요. 정직하게 일하는 사람들의 육체와 정신 속으로 자신의 정결한 야성을 깃들인 그 멧돼지는 차라리 행복한 녀석이란 생각입니다.

돼지우리를 지었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그 전에 있던 작고 허름한 장작 보관창고를 통나무 몇 개로 뚝딱 막았을 뿐입니다. 돼지우리를 본 아재들은 하나같이 걱정인 모양입니다. 돼지의 힘을 우습게 보지 말라는 것이지요.
길들인 집돼지이긴 하지만 아직까지 피 속에 흐르는 야성의 힘을 뭘로 보고 그리 허술하게 시늉만 내어 돼지우리라 할 수 있냐는 것이지요. 더군다나 돼지가 살기에는 공간이 너무 작다는 것입니다.
어렸을 적 집에서 키우던 몸피가 작은 검정돼지 새끼를 구해 키울 생각으로 돼지집을 작게 지은 것인데 섭섭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백방으로 알아보고 있으나 근수가 안나가 돈이 안되는 토종돼지를 아직 못 구했습니다. 아무튼 돼지를 키우면 가끔 자유를 주어 꿀꿀거리며 돌아다니게 문을 열어줄 생각도 하고 있지만 아무래도 돼지집을 키우고 더 튼튼하게 지어야 할 것 같습니다.

이 문제의 돼지집을 짓는데 재미있는 일이 하나 있었습니다. 우리집 강아지 장보고란 녀석이 쫄랑거리며 돼지집 안으로 들어가 턱하니 눕는 것입니다. 마루바닥 아래에서 헌 이불을 깔고 사는 보고는 시샘이 난 모양입니다.
보고는 장흥,보성,고흥사람들이 함께 만난 지역모임에서 알게된 보성의 한 선생님 집에서 데려왔습니다. 이름도 그 만남에서 유래한 것이지요. 보성의 강아지 주인과는 절대 잡아먹거나 개장사에게 팔지 않는다는 약속을 한 터입니다. 보고는 제 집인 양 들어가 누웠겠지만 이 집에서 살 녀석은 아마 푸른 가을 어느 날이면 사람의 입 속으로 들어가야 할 운명일 터인데 이를 비웃기라도 한 듯한 모양새가 연출된 것이지요.

정직하게 일하는 사람들의
육체와 정신 속으로 들어가는
그 멧돼지는 행복한 녀석입니다


광주의 젊은 벗들이 와서 함께 주춧돌을 심었습니다. 자연석이라 생긴대로 밑바닥 흙을 파서 앉히고 나무 메뎅이를 쳐 흙을 다져 넣으며 주추를 놓았습니다. 집의 기둥이 설 자리라 어느 정도 수평을 맞추며 수 없이 흙을 다져야 하는 고된 일인데 처음하는 벗들이 용케도 잘 해냈습니다. 그리하여 집이 들어서면 가까운 벗들과 조촐한 잔치를 벌이려 돼지도 키우려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순정한 채식주의 동지들이 이 소리를 들으면 웬 고기를 먹느냐고 야단칠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한두 마리 집에서 길러 대사(결혼이나 초상치는 큰 일)를 준비하는 지혜는 우리가 이어 받아야할 좋은 전통이 아닐까요.
한치의 산과 들의 온갖 풀과 음식찌꺼기를 먹고 자란 돼지의 고기를 즐겁게 먹으며 잔치를 벌일 날이 너무나 기다려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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