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들아, 내 생도 봄날이다
애들아, 내 생도 봄날이다
  • 시민의소리
  • 승인 2002.04.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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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는 이겨유~"
"아자씨, 파이팅!"

요즘 SBS 드라마 '명랑 소녀 성공기'의 주인공을 맡은 장나라가 인기 '짱'이다. "아자씨의 불행은 곧 나의 행복이구만요" 하며 소리치는 명랑소녀. 굳세고 씩씩하며 시원시원한 성격의 차양순(장나라 분)이 학교의 아침 자습시간을 흔든다.

'명랑소녀 성공기'가 방영된 다음날 아침은 여기 저기서 장나라 얘기다. '단 10분이라도 집중하는 훈련을 해보자'고 어르다가 '떠든 사람은 벌준다'고 협박을 하여도 수근거린다. 상철이는 입단속을 하고 있는 나에게 되레 코밑 질문을 한다.
"선생님, 명랑소녀 보셨어요?"
대답 대신 "아자씨한테 참말로 실망했그만유.”하고 양순이 흉내를 냈더니 녀석의 얼굴에 배시시 웃음이 번진다.
"어! 선생님도 보시네."

"선생님, 명랑소녀 보셨어요?"

일이 이쯤되면 '나라짱'이 등장하는 그 드라마를 전혀 안 볼 수가 없다. 언제 녀석들의 질문공세가 터질지 모르기 때문이다. 상철이는 그 뒤로도 가끔 내가 드라마를 보는지 안보는지 살펴왔다. '선생님, 황후가 뭐대요' 이런 식으로.

학교생활을 하다보면 아이들의 손짓 발짓까지도 허투루 넘겨지지 않을 때가 있다. 왜 이런 말을 했을까. 왜 지각을 했을까. 작은 일도 들여다보게 되고 신경을 쓰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을 잘 모른다고 생각될 때가 있다. 친해지고 싶어해도 자기만의 방에서 나오지 않거나, 쉽사리 마음을 열지 않는 경우가 있다. 그럴 때면 조금 서운하다.

하지만 입장을 바꿔 생각해보면 서운할 일도 아니다. 많은 기성세대들이 그렇듯이 선생님은 저희들의 세계를 모른다고 생각한다. 아이들에게 선생님은 선생님일 뿐이다. 저희와는 다른 종족인 것이다.
'어! 선생님도 보시네'라는 상철이의 한 마디에는 많은 것이 함축되어 있다. 선생님이 저희들의 세계에 대해 알고 있다는 것에 대한 확인이고, 저희들이 좋아하는 것을 배척하지 않는 다는 것에 대한 안도이다. 시쳇말로 선생님이 저희들 편인가 아닌가 '간을 보는 것'이다. 여러 경로를 통해 간이 맞는 것이 확인되어야 아이들은 한 걸음씩 자기들만의 방에서 나온다.

문제는 어른들이다. 무조건 '안된다'는 말은 아이들에게 설득력이 없다. 뿐만아니라, 스스로 아이들과 벽을 쌓는 지름길이다. 그래서 나는 아이들 속으로 내가 걸어 들어가는 길을 택했다.

얼마전, 하교시간이 훨씬 지났는데 운동장 한쪽이 시끌벅적했다. 우리반 아이들이 끄트머리 쪽에서 무슨 놀이를 하고 있었다. 반갑기도 하고 궁금하기도 하여 신발을 신고 나가 보았다. '으라차차'하며 대여섯 명이 어우러져 말뚝박기를 하고 있었다. 한껏 흥이 나 있었다.
'늦었으니 이제 그만 집에 가라.' 했더니 딱 한 판 만 더 하고 가겠다고 사정이다. '그럼, 선생님도 한번 타보자' 했더니 엎드려있던 남학생들이 벌떡 일어서며 꺄꺄 괴성을 지른다. '선생님이 홍구보다 더 가볍다'해도 소용없다. '그럼 딱 한 판만 하고 가라, 허리 다치지 않도록 조심하고!'하며 과자 한 봉지를 내밀었더니 이번에는 여학생들이 악을 쓰며 달려든다.


아이들 속으로 걸어가기

아이들을 보내고 교문을 나서며 자동차 오디오 볼륨을 높였다. 배기성의 '내 생의 봄날은' 리듬이 경쾌하다. 나도 모르게 운전대를 가볍게 두드리며 흥얼거렸다. 스트레스도 확 날아가 버린다. 아이들과 친해지기 위해 억지로 듣기 시작했던 '최신 가요'가 이제는 나를 즐겁게 한다.

"상철아, 너희만 봄날인줄 아니? 내 생도 봄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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