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과 인권이 함께 하는 교육개혁 없누?
교육과 인권이 함께 하는 교육개혁 없누?
  • 시민의소리
  • 승인 2002.04.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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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의 말이 먹히지 않으면 불러내 곧잘 매를 때리는 교사, 학생은 자신의 공책 뒤에 욕설을 써갈겼다. '○○○, 교사 자격도 없는 놈, furk you! 학교를 떠나라.' 하나 어쩌랴. 재수가 없어서일까? 공책검사를 당하던 중 공책 제일 뒷장의 낙서가 발각되고, 정말 전라도 사투리로 '허벌나게' 맞아버렸다. 그것도 모자라 다시 교무실로 끌려와 다시 '허벌나게' 고통을 치르고….

1998년 전북 전라고등학교 학생의 청와대 홈페이지 게시판 건의글은 그 학생을 엄청난 사이버 필화(筆禍)사건으로 몰고갔다. 무기정학, 타시도에서 원정항의 농성까지 벌이는 소동이 거듭되면서 징계는 철회되었지만, 어쩌면 이 사건은 양반인 꼴이다. 오늘도 학교는 글머리의 예처럼 수많은 필화(筆禍)사건이 비일비재하다.

지방지에 소개된 최근의 예를 하나 더 들어보자. S중 학생들이 장애우를 위한 시설개선 건의 글을 구청이나, 시청, 시교육청 등의 홈페이지에 올렸다. 국어시간 '장애우'에 대한 모둠토의를 마치고 직접 자신들의 뜻을 전하는 체험을 유도한 교사의 수업의 결과였다. 하지만 재수없는 아이들은 시교육청이나 교육관련 기관의 홈페이지에 글을 올린 아이들이다. 시교육청은 교장·교감에게, 교장·교감은 다시 학생들과 교사를 불러 엄중히 꾸짖었다. 급기야 어떤 아이는 '다시는 선생님 시킨 것 하지 않을래요….'라며 오기 섞인 소리를 내뱉었다. 왜 구청이나, 시청에 글을 올린 아이들이 아니고, 교육관청에 글을 올린 아이들만 재수가 없었던 것일까?

<오늘도 학교는 '필화'의 연속>


단지 학교나 교육청의 덜된 인식 때문인가? 수요자 중심의 교육개혁이 빛 좋은 개살구였기 때문인가? 또 우리의 학교는 왜 이렇게 변하지 않는 것일까? 필자는 이러한 질문에 결코 학교 또는 교육청만의 책임이라 할 수 없는 우리 국민 모두가 안고 있는 더욱 근본적인 원인을 긴히 전하고자 한다.

그 원인은 단연코 '인권'을 '교육의 논리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파쇼적 교육론이다. 유교적 장유유서(長幼有序)이든, 일제 치하이래 80년대 군사독재정권에까지 이르는 천민자본주의의 파시즘이든 교육은 다원주의와는 아무 상관없는 주어진 정답을 베끼고, 복사 주입하는 치열한 전쟁터였다. 교육은 인간화 교육이어야 한다는 일부의 외마디 비명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이 땅은 지금까지 '인적 자원'을 배출하는 거대한 시스템이었다.

이 점에 관한 한 합의 아닌 합의, 즉 어찌 할 수 없는 대세로서의 합의가 이미 있는 듯 하다. 이것이 우리 교육의 비극이다. 정상적 상식으로도 받아들일 수 없는 '교육 아닌 교육'이 불가피한 '현실의 교육'으로 위풍당당하게 군림하는 것 말이다. '인적 자원'을 배출하는 방법에 대한 견해 차이만으로 개혁론을 왈가왈부한다면 어떠한 교육개혁론도, '인간의 얼굴을 한 교육'의 자리로 갈 수는 없다. 정확히 말하자면, 적어도 우리 사회는 여전히 학교를 인권의 사각지대로 남겨두기를 원할 것이다.

우리들에게 진정 필요한 교육개혁론은 교육과 인권이 서로의 적극적 방편으로 결합하는 학교이다. 표현의 자유, 언론의 자유, 결사의 자유 등 총체적 인 학생들의 자치활동을 학교운영의 민주적 틀로 받아들이는 교육개혁론이야만이 학교를 조련의 자리, 지식공장이 아닌 따뜻한 살과 피의 인간의 배움터로 만들 수 있다. 즉 교장을 민주적으로 뽑으면 무엇 하는가? 교육예산을 증액하면 무엇 하는가? 교사들의 복지는 나아질지 모른다. 혹 학교의 시설은 '삐까뻔쩍'해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학생들은 여전히 '인적 자원 배출소', '로보트 공장'으로 남지 않겠는가? 때문에 참교육을 주창하는 전국교직원노동조합도 좀 더 확실한 교육론(교사와 학생 관계방식)에 기초하여 자신의 참교육운동을 진행해야 한다.

교육과 인권이 결합하는 교육개혁


지금까지 모든 개혁들, 즉 교단선진화니, 수행평가니, 학교운영위원회니 하는 그 모든 것들이 결국 어른들만의 잔치 아니었던가 말이다. 학생들의 삶은 좀체로 나아지지않고, 여전히 야만스런 삶의 논리를 복제하고 있는데, 어른들끼리 '짜고 치는 고스톱'처럼 어설픈 기득권 싸움을 해온 것이 아닌가? 중세의 봉건질서를 일거에 무너뜨리는 프랑스 혁명이 결국은 무산계급, 노동자의 해방에 이르지 못하고, 단지 유산계급인 부르조아의 해방에 멈추고 말았던 것처럼 마찬가지로 교사들의 삶의 복지만 증가할 뿐, 학생의 삶을 변화시키지 못한다면 여전히 우리 학생들에게 인권이란 없다. 따라서 교육이란 없다.

인권이 적극적 교육의 원리가 될 때에 학교는 비로소 '대화'가 살아 숨쉬고, 진정한 '만남'이 시작되며, 민주주의를 철학으로 한 졸업생들이 사회를 창조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교장·교감, 교육청의 장학진이 교사를 대하는 것을 보면 교사가 학생을 대하는 잘못된 방식들과 참 닮아 있음을 느끼게 한다.

교육관료들은 항상 정답을 내리는 자이고, 교사들은 항상 지적을 받는 자이다. 교육관료들은 자신들의 계획으로 교육을 진행시키는 자이고, 교사들은 거기에 이런저런 역할로 짜맞추어져 실행하는 자이다. 교사와 학생의 관계도 마찬가지이다. 교사는 정답을 내리고, 학생은 지시를 받으며, 교사는 학생의 삶의 문제를 돌아보려 하기보다는 자신의 교육활동에 학생이 맞추어져 움직이면 그만이다. 교사들끼리의 협의보다 항상 교육관료들의 지침과 평가가 중요한 학교현실은 학생들에게는 친구들과의 공동체적 자치보다 교사와 입시현실의 지침에 따르는 충실한 개인이면 된다.

정말이지, 교사들은 교육을 하는 것이 아니라, '관리'를 한다. 학생집단을 그렇듯 관리하다가 교장·교감이 되면 교사를 관리하려 한다. 그것 밖에는 할 수 없다. 그것밖에는 배운 것이 없으니 어쩌랴! 이 노릇을.
어처구니없는 관료들의 모습이 사라지기를 원한다면, 교사들이여 학생에게 '인권'을 허락하는 자정운동과 교육개혁을 시작하라. 그때에 비로소 교사도 함께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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