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의 크리스마스
4월의 크리스마스
  • 시민의소리
  • 승인 2002.04.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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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1. 두어 주 전 토요일, 아니 일요일 0시 20분, 종일 잰걸음으로 서울의 복잡하게 얽힌 미로를 더듬으며 볼일을 마치고 마침내 귀향 버스에 몸을 실었다. 톨게이트를 지난 버스는 남쪽을 향해 속도를 내기 시작하고 나의 긴 하루의 여정도 끝에 이르렀으니, 잠시 지친 몸을 쉬게 하려고 잠을 청해본다. 그러나 감은 두 눈의 망막에 낮이 남긴 잔상들이 어른대는 통에 잠은 오지 않고 마음만 산란하여 차창 밖을 내다본다. 어둠에 잠긴 단조로운 풍경을 바라보는 동안 내 마음도 가라앉을 것 같아서였다.

그러나 성남, 수원, 평택, 천안을 지나기까지 차창 밖 풍경은 나의 기대와는 딴판이다. 온갖 이름의 간판들이 어둠에 잠기기는커녕 오히려 어둠을 배경으로 삼아 더욱 요란하게 빛을 내뿜으며 넘실댄다. 뉴욕뉴욕, 샹젤리제, 파라오, 알라딘, 꿈의 궁전 … 등등. 이런 간판을 내걸은 곳은 대개 모텔이나 나이트클럽 같은 유흥업소란 것쯤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이 업소들은 지친 나그네를 향해 이국적인 이름과 현란하게 반짝이는 네온사인으로 소리 없는 호객행위를 한다. 어서 오십시오, 당신이 꿈꾸는 쾌락을 드리겠습니다, 라고.

#공간2. 또 다른 토요일, 화순에 볼일이 있어 갔다가 밤 9시경에야 일을 마치고 돌아오게 되었다. 우리 일행은 새 생명의 기운이 향긋하게 감도는 춘야(春夜)에 인적 없는 시골길을 드라이브하는 서정에 취한 채 각자 말없이 상념에 잠겼다. 그러나 우리의 조용한 즐거움은 오래가지 못했다. 소쇄원 인근부터 광주호를 돌아 나올 때까지 줄줄이 도로변에 위치한 카페와 음식점들이 발산하는 불빛 때문이었다. 어두운 저녁, 카페의 창 밖으로 고즈넉하게 번져 나오는 불빛은 진부하긴 해도 낭만의 아우라가 실린 것이리라.

그러나 그 날 우리가 본 것은 그런 불빛이 아니었다. 아, 이런 것을 4월의 크리스마스라고 하는가! 일행중 한 사람이 농담삼아 말했다. 별 의미없이 '8월의 크리스마스'라는 영화제목을 패러디한 것이긴 했지만 우리의 눈앞에 펼쳐진 풍경의 야단스럽고 기괴한 분위기를 정확하게 표현한 말이었다. 건물마다 수천개의 전구로 지붕과 외벽을 휘둘러 감고 반짝이는 모습은 크리스마스 트리를 방불케 했다.

그 중 몇 곳은 주변의 나무까지 온통 전구로 치장하여 언뜻 보면 불타고 있는 줄로 착각할 만큼 눈부시게 빛을 쏟아내고 있었다. 근방을 지나가는 어떤 불나방도 그냥 보낼 것 같지 않은 맹렬한 빛의 유혹……

공간1과 공간2는 지리적 차원에서는 상이하지만 그 형식과 기능에 있어서는 동일하다. 둘 다 상품화된 쾌락의 소비장소인 것이다. 상품의 표면에서 반짝이는 교환가치가 노동자가 흘린 땀의 흔적을 지우듯이, 공간1과 공간2에서 발산하는 빛의 동일성은 국가 총 생산량의 4분의 3이 집중된 수도권과 생산적 경제활동이 빈약한 변방간의 차이를 은폐하고 시장의 논리에 따라 자본의 자기증식 회로에 순조로운 편입을 위한 조건을 제공한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지역의 특수성이 사라진다는 사실이다. 또한 공간이 보편적 시장으로 재편될 때에는 시간도 반복적이고 순환적인 자연적 시간의 흐름에서 벗어난다. 자본의 시계는 시/분/초로 분절되는 선형적 시간을 따르고 생산성을 높이기 위한 속도만을 중시한다. 그러므로 4월 혹은 연중 아무 때라도 판매 촉진을 위해서라면 수시로 '크리스마스'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백화점에서 각종 명목으로 바겐세일을 일년 내내 기획하는 것이나, 또는 양계장에서 닭들이 더 많은 달걀을 생산하도록 밤에도 전기불을 켜두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이다.

그러나 공간1과 공간2 사이에 엄연하게 존재하는 불균등한 발전의 모순은 어떻게 풀 것인가? 4월의 크리스마스를 즐기는 동안 우리가 치뤄야 할 대가는 무엇인가? 초라하게 무너져 가는 소쇄원의 인근에 생소한 외관을 갖춘 레스토랑들이 늘어가는 이유는 무엇인가? 지역의 특성을 살리고 자연의 훼손을 막기 위해서라도, 현재 우리가 위치한 시공간에 대해 첨예한 정치경제학적 인식과 그런 인식을 토대로 한 제도적 노력이 절실하게 요청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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