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권하는 사회를 위하여
시 권하는 사회를 위하여
  • 시민의소리
  • 승인 2002.04.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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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또래의 독자들은 알 것이다. 한 10여 년 전까지만 해도 다들 얼마나 시를 많이 읽었던가를. 다소 과장하자면 굳이 문학도가 아니라도, (비록 소수이긴 했으나)노동 현장의 노동자들이거나 까맣고 투박한 손의 농민들이거나를 가리지 않고 시를 쓰고 읽었더랬다. 소중한 이에게 줄 선물로는 으레 시집이 최고였고, 그렇게 시집을 건네 줄 때도 시집 표지 뒷장의 여백에는 짤막하게 멋스러운 사연 하나쯤 적어 넣는 게 당연하던 시절이었다. 말하자면 시에 대해 아주 우호적인 사회였다.

아마 어떤 이유가 있었을 터인데, 아무래도 내 생각에 그 이유란 그 때의 우리 사회가 '시 권하는 사회'였던 탓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분출하는 에너지가 충만한 사회일수록 시가 융성했음은 동서 고금을 막론하고 확인 가능한 역사적 사실이다. 산문으로 다 못할 만큼 비장하고 격렬한 이야기들이 시의 형식을 빌릴 수밖에 없었을 거라는 얘기다. 거기에 그 시대가 '시'와 같이 아무런 사용가치나 교환가치 없는 정신적 가치들에 대해서도 너그러워야 한다고 소리 높여 주장하던 시대였단 점 또한 이유가 될 줄 안다.

그러나 이즈음으로 눈을 돌리면 사정이 완전히 다르다. 사회는 이제 더 이상 시를 권하지 않는 모양이다. 심지어 문학을 전공한다는 대학생들조차도 신동엽이며 김수영을 모르고, 현장의 노동자들이며 농민들은 시집이란 이름으로 불리는 그런 책이 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린 것만 같다. 동업자들, 말하자면 시 쓰는 사람들끼리도 서로의 시를 읽지 않는다는 푸념이 이제 더 이상 낯설지가 않을 지경이다. 십 수년 사이에 사회가 시에 대해 이토록 적대적이 될 줄 누가 알았을까?

확실히 작금의 우리 사회는 시에 대해 적대적이다. 일단 시 읽을 시간을 주질 않는다. '시'란 사실상 사용가치나 교환가치로 치자면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언어들의 조합에 불과할 진데, 효용과 합리성에 의해 전일적인 지배를 받는 사회가 '시'를 쓰고 읽는 시간에 대해 너그럽기를 기대할 수는 없는 일이다. 5,000원을 투자하면 그 이상이 뽑아져 나와야 '가치 있다'라는 소릴 듣는 게 이 사회의 논리이다. 그렇다면 시집 값 5,000원은 버리는 거나 진배없는 게 아닌가? 요즘 말로 신자유주의는 그런 의미에서 보면 시에 대해서도 폭력적이라 할 만하다. 생산하고 이윤을 창출하고 소비하고 경쟁하는 시간 외에 다른 모든 시간들은 낭비이고 소모가 된다. 시 읽는 시간은 사치의 시간이 되어 버린다.

시간만이 아니다. 시간이 아무리 남아돌아도(예를 들어 주 5시간 근무가 쟁취되었다 해도), 그 시간에 시를 읽기 위해서는 시를 읽을 만큼 여유로운 마음과, 지성, 소위 '시심'이라고 하는 것이 전제되어야 한다. 가령 시를 즐길 수 있어야 하고, 자연에 대해 열린 감수성을 가져야 하고, 느린 속도에 적응해야 하고, 운율에 민감해야 하고…… 등등. 물론 그것은 시를 달달 외우고, 문제를 풀고, 분석하고, 시험을 보는 식으로 길러질 성질의 것이 아니다. 우리 사회는 한 번도 그 성원들에게 시심을 길러보라고 권해 본 적이 없는 것이다. 시 사회는 교육적으로도 시에 대해 적대적이다.

이렇게 보면, '요즘 사람들 시 안 읽어서 큰일이야'라는 푸념은 사태의 일면밖에 보지 못한 소치이다. 사회가 '시 권하는 사회'가 되기 전까지 책임은 독자에게 있는 것이 아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시가 대접받기 위해서는 먼저 사회가 바뀌어야 한다. 사회를 변화시켜야 시심이 돌아온다. 물론 역도 가능하다. 이토록 시에 대해 적대적인 시절에 시를 (열심히 읽을 필요도 없다. 느릿느릿, 천천히, 마치 자본의 논리를 비웃듯이 한가하게) 읽는다는 것은, 곧 세상을 변화시키는 일이기도 하다. 세상이 시를 닮아가도록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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