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서는 지역문화
스스로 서는 지역문화
  • 시민의소리
  • 승인 2002.03.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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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중앙 중심적 역사와 관료적 권위주의에 길들여진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수도권 밖의 지역에 살건 수도권에 살건 중앙-주변의 관계가 정체성의 주요한 사항으로 자리잡아 왔다. 중앙과 연계되는 사회관계의 넷트웍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곧 지역에서 권위와 권력의 원천이 되고 자기 존재 가치의 원천이 되어 왔다.

중앙-지역의 전통이 강하다 보니 상대적으로 취약했던 것은 첫째, 지역 내의 의사결정에서의 자결(自決), 그것도 지역 내부로 향하는 자결의 전통이고, 그것도 평등하고 호혜적인 사회관계 속에서의 의사결정의 전통이다. 둘째, 지역문화의 특수성에 대한 분별적 지각(知覺)이 취약해져 왔다. 지방적인 것이 세계적이라는 말은 구호일 뿐이며, 특수성을 가꾸어낼 만한, 지역 내부로 향하는 시각과 지각이 약화되어 왔다.

반면에 구호 속에 나오는 지역의 특수한 문화란 사실상 중앙-지역의 넷트웍에 편제될 뿐인 일반화된 전통이 되어 버렸고, 이제는 글로벌 스탠더드에까지 편제될 상황에 처해 있다. 생생한 지역 사회사와 사회관계와 삶의 양식이 특정의 지역적 형식과 미학에 의해 살아 숨쉬는 문화를 생산하기 어렵게 되었다. 지역 자체 내에서, 지역으로 향하는 인간관계와 커뮤니케이션의 틀 속에서, 지역 삶의 의미를 교환하고 상징을 생산하는 문화생산이 대단히 취약해 있다.

전반적 상황이 이러하지만 이에 대해 문제의식을 느끼는 곳들도 없지 않다. 2001년 가을, 저명한 예술인들을 거부하고 자체 내에서 의사소통과 연희의 향유, 그리고 먹을 것의 나눔으로 행사를 관철해 나간 해남 미황사 음악제는 이러한 현실을 극복하고자 했던 강한 문화적 반응의 하나였다. 또한 전남 몇몇 마을들에서는 지역 문화엘리트가 철저하게 주민과 협동하여 주민간의 커뮤니케이션과 주민의 의사결정, 그리고 주민의 문화적 판단에 따라 회의, 음식나누기, 연희 등을 수행해 나갔던 경우가 있다. 놀랍게도 여기서 주민의 자율성이 크게 부각되어 나왔고, 그간 상실해 가던 호남지역 문화의 보고(寶庫) 말놀이(word play)가 다시 활력을 찾았다. 연희에서도 이미 탈각되어 찾기 힘들었던 전통이 재생되어 나왔다.

주민간의 사회적 상호작용이 생생하게 이루어진 결과 서로의 지각을 자극하여, 그간의 박제화된 문화요소의 껍질을 뚫고 자신의 형식과 내용을 찾은 것이다. 여기까지 오는 데에는 이곳 출신의 한 엘리트가 십 수년 동안 주민들과 다양한 사회적 협동을 해왔고 살림살이의 애환을 함께 이야기해 왔으며, 사람들의 세상사는 방식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어 온 역사가 있다. 그와 주민들은 어떤 경제적, 사회적 선택이나 연희 행위에 대해서도 같은 이해(理解)의 맥락과 같은 지각, 감각 위에서 이야기한다.

지역 삶과 지역의 연희에 대해 자신들의 세계가 구축(構築)되어 있다. 이들에게 문화행사란 단순한 이벤트가 아니고 자신들의 이야기이다. 여기에는 중앙-지역의 관계가 어떤 긍정적, 부정적 영향도 주지 않았고 중앙-지역 관계에서 오는 정체성이 개재되지 않았다. 자신들로 향하는 시각과 자신들 문화에 대한 지각, 그리고 자신들끼리의 사회적 상호작용이 있었을 뿐이다.

이곳에서는 앞으로 이야기 마당이 열릴 예정이다. 공식 행사라기 보다는 일상적으로 모여 살아 온 생애사 이야기도 하고 지금 살림살이 이야기도 하는 마당이다. 이야기 마당을 만드는 것은 주민들이 스스로 자기 존재의 가치를 인정하게끔 하는 계기를 만드는 일이다. 세상이 아무리 어려워져도 사람들은 기가 꺾이지 않고, 제 목소리를 내면서 살고 싶어한다. 지역 농어촌이 가치가 있는 것은 그래도 아직은 노인들이 제 목소리를 낼 수 있고, 마을에서나마 자기 존재의 가치를 인정받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자기 인생의 보람을 서울로 간 아들이 출세한 것에 두고 자기는 이곳에서 여생을 살다가 죽으면 그만 이라고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곳만이 자신의 사회적인 값을 펼칠 수 있는 곳이라는 생각을 한다. 바로 이렇듯 주민들이 자기 존재의 가치를 인정하도록 계기를 만들며 스스로를 구현할 계기를 만드는 일이 이곳에서 벌어질 예정이다. 과연 이러한 작은 움직임들이 오늘날 풍미하는 거대 지향적, 상업 지향적 문화행사, 과시와 관객 끌기에 치중하는 문화행사의 열풍 속에서 그 귀한 빛을 잃지 않도록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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