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근리'에 비친 한국언론의 부끄러운 '뒷북'
'노근리'에 비친 한국언론의 부끄러운 '뒷북'
  • 시민의소리
  • 승인 2002.03.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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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일이 다 끝난 뒤에야 수선을 피우는 것을 보고 흔히 '뒷북을 친다'고 한다. 그래도 사소한 일상 속에서 나타나는 '뒷북'은 그 어리석음으로 인해 주위 사람들에게 웃음이라도 준다.

하지만 한 나라의 유력한 집단이 약속한 듯 동시에 뒷북을 쳐대는 모습에 대해 국민들은 짜증스러울 뿐이다. 더욱이 사안이 수많은 생명과 역사에 관한 일인 경우엔 더 말할 나위가 없다.

현대사에서 역사적인 '뒷북'의 대표적 사건이라면 80년 5.18을 둘러싼 국내 언론들을 꼽을 수 있다.

당시 국내 언론에선 진실을 찾을 수 없었다. 학살의 현장은 독일을 비롯한 외신기자들을 통해 기록됐고, 국내인들 보다 외국인들에게 보다 빠르고 생생하게 전해졌다. 이후 한국 언론에서 다뤄진 5.18의 영상은 대부분 외신에 의존했다. 국내 언론은 군사정권의 쇄락과 함께 뒤늦게서야 매년 5월 '특집'으로 보도하기 시작했다.

한국 언론의 뒷북은 한국전쟁 당시 미군에 의한 민간인학살 사건으로 알려진, 이른바 '노근리사건'에서 선명하게 드러났다.

지난 99년 9월 30일 오전 2시(한국시각). AP통신은 '노근리의 다리'라는 제목으로 한국전쟁 당시 충북 영동군 황간면 노근리의 경부선 철도위에 모인 피난민 500여명에 대한 미군의 민간인학살 사건을 다룬 기사를 내보냈다.

이 기사에는 당시 사건과 관련, 미군 상급부대가 "그들(피난민들)을 적으로 취급하라"고 명령을 내렸다는 명령서 및 공문, 그리고 참전군인의 증언 등이 포함돼 있었다. 50년간 숨죽인 채 마을 전체가 같은 날 제사를 지내야 했던 주민들의 한 맺힌 사연이 외신을 통해 전 세계에 알려진 것이다.

국내 언론은 들끓었다. 각 언론사들은 앞을 다투어 AP의 보도를 인용했고, 당시 피해자 대책위원들의 움직임 하나하나가 언론의 주요관심사로 떠올랐다. "우방인줄 알았는데, 미군이 그럴 수 있느냐"는 국민들의 목소리가 연일 신문지면과 방송보도를 통해 여과 없이 보내졌다.

그렇다면 노근리 사건은 AP보도가 처음이었나. 아니다. 이보다 5년 전 한겨레신문에서 보도한 바 있고, 그 보다 앞서 월간 말지에서도 심층취재를 한 바 있었다.

그러나 이들의 보도의 '변방'의 울림에 불과했을 뿐 국내의 주요 언론은 관심을 갖지 않았다. 노근리를 '해방'시킨 건 세계 4대 통신사중의 하나인 AP통신이 날린 한통의 전문이었던 것이다.

AP통신의 보도 이후 경쟁적으로 뒷북을 울리던 한국 언론은 다시 잠잠해졌다.

교육방송 27일, BBC제작 '노근리' 진실 방영
외신에 의해 밝혀지지는 한국 역사
한국언론의 부끄러운 현주소


그리고 3년 뒤, 이번엔 영국의 BBC가 노근리와 한국전쟁당시 미군에 의한 민간인 피해자들을 해방시키는 데 나섰다.

영국 국영 BBC방송은 지난달 1일 밤 9시(현지시각)부터 50분간 한국전쟁 당시 미군의 전쟁범죄 행위를 고발하는 프로그램 "모두 죽여라 (KILL'EMALL)"을 통해 지난 50년 7월26일 한국내 미군 최고사령부였던 미8군이 모든 한국 민간인에 대한 정지명령을 내렸다고 밝혔다.

이 방송은 그 근거로 그동안 없어졌다던 미군의 공문서를 통해 "모든 피난민의 전선통과를 금지한다. 전선통과를 시도하는 모든 사람에게 발포하라. 여자와 어린이의 경우는 신중히 판단하라"는 요지의 명령이 있었음을 확인했다.

이와함께 한국전쟁당시 포항인근의 해안에서 미 해군함정의 발포로 4백여명이 학살된 사실과 미 공군이 육군의 요청으로 민간인에게 기총소사를 가한 사실도 밝혀냈다.

한국 언론은 다시 이 사실에 대해 단순보도를 했고, EBS는 오는 27일밤 10시 이 다큐멘터리의 방송을 편성했다. 다큐멘터리의 제목 ‘모두 죽여라’는 학살당시 한 미군 사병이 장교에게 들었다는 “모든 것을 향해 발포하라, 모두 죽여라(Fire on everything, Kill'em all)"라는 명령에서 따온 것이다.

AP통신이 3년전 노근리에 대한 국내의 여론을 불러일으켰다면, BBC는 발뺌하던 미국측에 증거를 내밀면서 진실에 더욱 가까이 다가간 것이다.

결국 노근리사건은 묻힐 뻔했던 한국의 역사의 단면을 복원시켰다는 의미와 함께 한국 언론이 가진 뒷북 속성을 여실히 보여주는 계기로 작용했다. 언제까지 한국국민은 자국의 진실을 외신을 통해 들여다보게 될 것인가. 한국 언론의 부끄러운 자화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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