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쇄함을 짓이겨 놓은 인적
소쇄함을 짓이겨 놓은 인적
  • 시민의소리
  • 승인 2002.03.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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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세상이 울긋불긋 꽃 대궐이다. 이만한 계절이면 굳이 도심 밖으로 아둥거리며 떠나지 않고 내가 살고 있는 집 주변 만 어슬렁거려도 쉽게 꽃에 취할 법한 계절이다.
올 봄에는 이 꽃이라는 것이 영리하기가 사람 보다 훨씬 수위가 높다는 것을 알아보자.

이른 봄, 재빨리 꽃을 피우는 식물들을 보면 대부분이 독성과 강한 향기를 가지고 있거나 현란한 색감을 가지고 있다.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이런 방식의 드러냄을 주었을까? 생각해보면 사람과 다르지 않다. 사람이 화장을 하고 머리를 이리 저리 쓸어 올리고, 눈을 깜빡거리며 앞뒤 가리지 않고 기회만 되면 한 몫 잡으려 길길이 날뛰듯이 봄의 꽃들 또한 그들의 양식과 기율이 있다.
도드라져 보이는 현란한 노란 색 복수초나 푸른 현호색, 개불알풀 따위는 아직 낙엽에 의해 자신의 존재가 벌과 나비에게 노출되지 못한 점에 착안하여 이런 색을 택했을 것이다.

또한 이들이 지닌 독성이라는 것은 겨우내 굶주렸던 초식동물들로부터 스스로의 안전을 지키기 위한 또 하나의 방법일 것이다. 불현듯 눈에 보이는 식물의 잎사귀를 물었다가 강한 독성에 혀가 얼얼해지는 느낌을 받은 토끼나 노루들은 다시는 이런 풀들을 거들떠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노출되지 않고 낙엽더미 속에서 꽃을 피우는 무리들도 있다. 그들이 지닌 대부분의 특성은 개화시기가 짧다는 점이다. 빨리 꽃을 피우고 빨리 씨앗을 세상에 뿌려 종족을 번식하고자 하는 생애의 특징이 또 거기 담겨있다.

대저 사람의 삶과 식물의 삶이라는 것이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삶이 곤궁한 인종은 조혼의 풍습을 지닌다. 원의 지배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던 고려의 조혼 풍습이나, 일제 강점기의 조혼풍습들은 아스팔트와 시멘트 보도 사이의 틈새에서 자라는 민들레의 생과 별반 다르지 않다.
척박한 삶에서 스스로 싹을 틔우고 벌과 나비를 불러들이고 그리고 암술과 수술이 만나 열매를 맺고 씨앗을 날리는 과정.

봄의 푸른 기운 무르 익건만
사람들이 짓이겨 놓은 척박한 땅엔
풀 한 포기 심을 공간도 없다


그런 과정이 세상의 혼란 혹은 자연의 척박함과 견주어 다를리 없는 상황에서 바위 사이의 영리한 민들레는 재빨리 꽃을 피우고 수정을 하고 그리곤 벌써 씨앗을 세상에 보낼 준비를 마쳤다. 그 씨앗이라는 것이 미세한 바람에도 더 멀리 갈 만한 조건들을 갖추고 있다.
뿌연 황사가 세상을 덮고 있는 가운데 부쩍 말랐던 대지에도 봄의 기운이 무르익고 두터운 옷을 입었던 나무들도 갑옷을 떼어내며 푸른 기운을 뿜어 올린다. 흐느적거리는 버드나무의 푸른 매무새는 매일 그 부피를 출렁거리며 땅을 향해 머리를 조아리는 계절.

제주 양씨 산보의 구업이라는 소쇄원에도 봄이 찾아왔다. 댓 잎을 살랑거리며 개울물길을 따라 매화가 피고 바위 사이에 제비꽃도 방긋 웃으며 봄과 손님을 맞아 주고 있었다. 하지만 어찌나 사람의 발길이 많은지 맑고 깨끗한 선비의 공간 소쇄원은 더 이상 소쇄하지 못하다. 없는 길도 새로 만들어 나가는 사람들 덕분에 계곡쪽에는 대나무를 쪼개 방책을 만들어 짐승이 울을 넘는 것을 막듯이 사람의 발길을 막고 있었다. 푸른 대나무가 곳곳에 들어서서 점점 누렇게 색이 변해가고 있고 사람이 짓이겨 놓은 소쇄원 마당에는 풀 한포기 심을 축축한 공간은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오래된 산수유나무에는 봄이 또 깃들여 있다.
그리고 척박한 바위틈 사이로 민들레가 제 혼자 꽃을 피워냈다.

470살 먹은 이 공간을 지켜온 주인은 어디론가 떠나고 손님들만 정자 마루에 눕거나 앉아서 자신의 이야기들을 지껄이고 있고 어느 누구도 봄을 가져다 준 양씨 가계에 대한 이야기는 꺼내지 못한다.
소쇄원이 소쇄해 진다는 것은 현 시기에 너무 막연한 기대일지 모른다. 돌아오는 길에 소쇄원이 스스로의 변화를 시도하지 않으면 짐승의 입에 뜯기는 달콤한 풀처럼 그리 되지 않을까 하는 걱정만 잔뜩 가지고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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