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변에서 봄 여행을 시작해 보자
강변에서 봄 여행을 시작해 보자
  • 시민의소리
  • 승인 2002.03.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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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침잠하여 우울해지는 법도 있지만 올 겨울은 나를 둘러싼 음습한 기운과 그로 인해 발생했던 여러 일들이 밀물처럼 다가와 내 가슴을 짓눌렀다.
어디 나 혼자 뿐이겠는가.

우리 민족에게 부시라는 한 쌀나라 촌장이 던졌던 언어의 횡포와 소금의 마을에 우리고장의 젊은 청년이 당했던 도적질은 내 사적 감정보다 더 참혹하고 분통터지게 했던 겨울이었다.
그렇다. 잿빛 하늘처럼 슬픔이 많았던 겨울이었다.

하지만 어둠의 뒤끝 어딘가에는 희망의 새싹이 잉태되고 있을 것이다.
언제나처럼 잿빛 하늘 뒤에 숨겨진 청명함이 가벼운 떨림으로 세상을 향해 얼굴을 내밀어 올 것이다.
아주 천천히 말이다.
우리는 그놈이 있기에 아직 세상은 살만한 것이라 여기고 거기에 실낱같은 희망을 모으고 기다려 오길 반복하고 있다.

우연한 일들로 영산강의 지류가 있는 영암을 몇 번 찾았을 때 바닷물과 육지의 물이 섞이는 지점에서 이곳과 저곳의 경계를 구분하지 않는 기러기 무리들을 만났다.
아직 겨울이라는 것이 그들의 날개짓에 똑똑 묻어 났다. 하지만 볕이 몇 일 동안 구름이 개입할 여지를 주지 않자 세상은 너무나 포근하게 변했고 오리들은 그들 특유의 체온계로 이곳과 이별할 준비를 하는 듯 보였다.

밤하늘을 끼룩거리는 소리가 도심에서도 환청으로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봄이 왔으리라는 예감을 가지고 다시 강변으로 나섰다. 강자락을 타고 오는 청량한 봄바람에 마음을 식히고 싶은 탓이었다.

그곳에서 나는 버들개비가 꽃을 피워낸 모습을 바라보았다.
보송한 흰솜털로 동장군으로 부터 자신을 지키고 있던 버들개비가 어느새 무장을 해제하고 기지개를 펴낸 것이다.

그리고 몇몇은 생명을 잉태하기 위해 불그스레한 꽃을 피우고 있었고 벌써 노란꽃밥을 달고 있는 것도 있었다.
가까이 바라보면 볼수록 아름다운 그 꽃의 자태는 봄이 왔음을 세상에 알려주는 전령으로서 더 큰 의미를 지니기 때문일 것이다.

경이로운 버들개비의 모습을 보며 물오른 버들개비를 꺾어 피리를 불었던 유년을 떠올려 보기도 하고,씁쓸한 입맛때문에 입을 쓰윽 문지르면 묻어나오는 청록의 푸름과 어쩜 비슷해 보이는 양약의 쓴맛이 흡사했던 기억, 이들이 생명을 날리는 기간 동안 안대를 하고 다녔던 몇 명의 친구들에 대한 추억을 더듬어 보았다.

그리고 내가 간직해왔던 꿈들을 함께 되뇌여 보았다. 아름다웠던 시절에 대한 회고가 비로소 완결되는 듯 했다.
강아지의 털처럼 보송한 모습 때문에 이름을 가진 버들강아지 앞에서 나는 어둠의 뒷 끝에 머물던 희망이 세상에 솟구치는 모습을 보았다.

봄이 온 것이다. 새싹이 드디어 얼어붙은 세상을 정복하게 된 것이다.
칼바람과 어둠 때문에 세상에 발 딛기를 주저했던 사람들은 이제 세상에 다녀도 된다.
겨우내 얼었다 녹기를 반복했던 땅의 기운이 오는 봄을 주체하지 못해 스스로 몸을 강에 겨워내는 모습이 붉은 강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까지 보이고 있으니 말이다.

시작하는 달 3월, 초봄의 여행은 흐르는 강물 곁에서 시작해 보자. 그 강물에 지난했던 어제의 기억들을 홀랑 털어버리고 생명을 가장 먼저 길어 올리는 갯버들에서 새로운 시작을 다짐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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