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온 '오월의 사나이' 이경률씨
돌아온 '오월의 사나이' 이경률씨
  • 시민의소리
  • 승인 2002.02.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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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일 낮 광주공항. 마중 나온 20여명의 동료와 선후배들 앞에 '오월의 사나이' 이경률씨(41)가 가족과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 광주와 고국을 두고 떠난 지 두 해 만이었다. 그러나 떠날 때는 네 명이었던 가족이 돌아올 때는 셋으로 줄어 있었다.

"그동안 저희 가족에게 베풀어주신 관심과 사랑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감격스러웠을 동료들과의 재회에서 이씨의 인사말은 간단했다.

둘째 아들 용우(당시 9세)가 국내에서 처음 발견된 신세포암 판정을 받자 어떻게든 고쳐보겠다며, 이씨가 가족과 함께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은 것은 지난 99년 가을.

당시 용우의 병은 국내 의료기술로 치료가 불가능했다. 게다가 사회운동으로 집안 일을 돌보지 못했던 이씨로서는 치료비 문제도 큰 일이었다. 이씨의 딱한 사정이 신문지상에 보도되자 그와 함께 민주화운동을 해왔던 지인들을 비롯해 각계각층에서 뜻이 모아졌고, 이들의 격려와 지원 속에 네 식구는 미국으로 떠났던 것이다.

"아들을 낫게 해 도청 앞 5.18광장에 손잡고 돌아오겠다"
이씨의 다짐은 그러나 지켜지지 못한 채 많은 이들의 가슴에 안타까움을 남겼다. 용우는 결국 이듬해에 세상을 떠났고, 이씨는 정신지체장애를 가지고 있던 큰 아들 동훈이(12세)라도 치료를 해야겠다며 힘겨운 미국생활을 계속했다.

이제 광주의 품으로 돌아온 이씨. 이 땅에서 그가 비웠던 2년이 그에게 고통이 아닌 새로운 삶의 희망을 키운 기억으로 각인되게 하는 것은 오월 광주의 넉넉함 뿐일 것이다.

이씨는 80년 광주고를 나와 전남대 불문학과에 입학, 5.18항쟁을 생생히 지켜보았다. 군대를 마친 85년 학생운동에 뛰어들어 87년 민주쟁취국민운동 광주전남본부에서 일하며 6월항쟁에 앞장섰다. 이후 전남민주주의청년연합 의장을 역임하는 등 광주 사람들은 89년부터 97년까지 해마다 5월이면 전남도청 앞 광장에서 열린 '5.18 정신계승 국민대회'의 사회를 맡은 이씨의 포효를 들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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