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미공'을 위한 헌사
'광미공'을 위한 헌사
  • 시민의소리
  • 승인 2002.01.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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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시대 미술문화를 진지하게 논의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 향후 광주 미술의 새로운 미학을 도출하는데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이는 '광미공'으로 잘 알려진 광주전남미술인공동체의 창립 10주년 기념전이 열린 지난 1998년 9월 20일자 어느 신문에 밝힌 당시 회장을 맡고 있던 화가 정희승의 다짐이다.

그처럼 "수많은 아픔이 아로새겨진 80년대를 뒤로하고 90년대 끝자락에서 겸허하게 스스로를 돌아보려는 시도"와 다짐은 의미 있었지만, 결국 작년 12월말 '광주'와 함께 애면글면 살아 온 광미공의 깃발은 소리없이 내려지고 말았다.

광미공이 드리운 행복한 그늘 아래 있었던 필자로서는 '해체'라는 충격적인 방식으로 과거를 보존하는 길을 택한 고뇌에 찬 결정을 이해하면서도 "광주 미술의 새로운 미학을 도출"해야 할 책무를 남기고 공동체의 문을 닫고 만데 대해 아쉬움을 금할 수 없다.

대체 무엇 때문에 필설로 다 못할 가시밭길을 헤치며 당당히 세워 온 영예로운 깃발을 스스로 내리고 말았는가? 한국현대미술사에 기록되어 남은 뚜렷한 족적 만큼이나 광미공의 자진해산은 많은 것을 생각게 한다.
90년대 들어 이른바 민중미술의 퇴장을 두고 이런저런 말들이 많았다. - 생존을 위한 대안 마련에 게을리 했다, '시장'에 대한 대응 담론이 부재했다, 뉴미디어의 시대에 대처할 논리가 없었다, 대중을 설득할 '작품'이 생산되지 못했다….

필자가 아는 광미공의 경우, 운동이 아닌 행동의 시대에 어울리는 체질 변화가 시급했다고 보았다. 그러다 보니 과거의 혁혁한 성취를 내재화하는 작업에 등한시하게 되었고, 결국은 급격히 약화된 자체 동력에만 의지해 '좁아진 통로' 속에 스스로 갇히게 되었다고 본다. 무엇보다도 오랜 기간동안 누적되어 온 '피로감'을 물리칠 자생의 환경을 만들지 못했다.
브뤼겔의 위대함은 그의 풍경화를 통해 이 세상에 사는 의미를 깨닫게 하는데 있었다. 그처럼 뜻있는 이들이 광미공의 퇴장을 두고 아쉬워하는 것은 '지금, 우리의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고, 그림을 통해 세상을 읽는 가치 또한 상존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제 '광미공'의 작가들은 단기필마로 경쟁의 험한 정글 속으로 하나 둘 뛰어들어 갈 것이다. 혹자는 지나온 과거가 짐이 될 수도 있을 것이고, 혹자는 과거의 그늘을 오래도록 벗지 못하고 방황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대개는 당장 전근대적 미술시장의 천박한 장터 속에 대면해야 하고, 그 혼탁한 관계망을 뚫고 스스로 세운 그림의 권위를 앞세워 생환해야 한다.

광미공이라는 실천미학의 미덕은 미술의 대중화였다. '그림'도 대중의 삶과 의식에 친밀한 대상이라는 것을 광미공의 10여년 활동은 웅변했다. 무엇보다도 오월광주가 추상으로 빠지지 않고 '민중'의 가슴에 밀착해 현재화를 가능케 한데는 광미공의 헌신을 빼놓고 말할 수 없다.

이 두 가지 사실만 놓고라도 광미공 외의 동료 작가들은 해체라는 소식에 진정으로 안타까워해야 한다. 근현대 미술사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이념적 지향이 다른 강력한 파트너가 부재한 고독한 행보는 참으로 끔찍하다. 광미공의 해체에 따른 '광주미술'의 재편은 미술계 전체의 공공성과 소통력 확보라는 문제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두고 볼 일이다.

광미공이 꿈꾸던 '아름다운 세상'은 여전히 도래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이 남긴 '아름다운 그림'은 오래도록 세상에 남을 것이다. 필자를 공동체의 식구로 받아 준 '영원한 청년'들의 따뜻한 눈빛을 오래도록 기억하겠다는 말로 이 짧은 헌사를 맺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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