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을 지으며
집을 지으며
  • 시민의소리
  • 승인 2002.01.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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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충선의 산골마을 이야기

아주 가까이 살갑게 얼굴 맞댄 고만고만한 산과 산 사이로 흐르는 강물을 막아 숲과 마을과 들판과 인심을 수장하고 있는, 댐 상류로부터 구불구불 산길을 돌고 돌아 십 리 들어오면 마침내 나타나는, 한때는 6~70여 가구가 살며 한해 동갑내기가 열명이 될 정도로 아이들의 울음과 웃음소리가 넘쳐났던, 모두 떠나고 좌변기와 보일러가 있는 문명화된 집들이 한 채 두 채 들어서며 시간의 두께를 내장한 따뜻한 구들장과 반듯하면서 차가운 시멘트 바닥이 어색하게 공존하는, 다섯 칸 겹집의 대들보나 기둥으로 쓸만한 소나무가 골짜기에 넋 놓고 쓰려져 있는, 표고버섯목으로 쓰이는 참나무 외에는 거의 모든 나무가 잡목으로 불리는, 하지만 여전히 멧돼지 식구들과 다정한 노루 연인이 살고 있는, 그래서 그들만의 자유로운 질서로 지어진 집을 가진 야성의 숲이 숨어있을법한 첩첩산중의 마을. 이 곳이 내가 살고 있는 집의 주소입니다.

새집을 지으려 댐으로 잠길 사십년된 집을 헐었습니다. 나무로 뼈대를 세우고 흙벽으로 살을 채운 우리네 살림집입니다. 기둥과 보를 못하나 박지 않고 절묘하게 연결해놓아 해체하는데 애를 먹었습니다. 조심스럽게 메뎅이(큰 나무망치)질을 했습니다. 이 집을 뜯는게 새집을 짓는 과정의 절반이란 얘기도 주고받았습니다.

오래된 집을 뜯어다 새 집을 짓는 내 속의 욕망 그리고 용기는 어디서 났을까 생각해봅니다. 나의 욕망은 분명합니다. 바로 '오래된 미래'에 대한 낭만적 동경이지요. 구들과 마루의 절묘한 결합에 대한 무한한 신뢰 말입니다. 물론 이산 저산에 적당히 잘린 채 굴러다니는 땔감을 날마다 눈으로 확인하는 것은 덤입니다. 그래서 나의 욕망은 논리적 언어로 표상되기도 합니다. 자원을 재활용하는 생태적 순환의 자립경제.


지천에 널린 땔감 놔두고
40년 된 오래된 집을 해체해
새 집 짓는 의미,


낡은 집을 뜯어다 새 집을 지을 용기는 어디서 났을까요. 먼저 아주 현실적인 이유입니다. 경제의 문제이자 육체의 문제입니다. 산골생활 일년동안 단련된 육체라면 아주 기술적인 공정 외에는 내 손으로 지을 수 있다는 무모한 용기입니다. 그래서 가난한 내가 경제적 부담을 최소화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공개한다면 14~5평 정도의 집을 천만원에 지을 생각입니다.(아직은 서툰 계산인데 여러분 생각은 어떠신지? 저기 웃고 계신 분도 보입니다.)

게으른 내 육체가 자극을 받고 놀라 깨어난 아주 중요한 만남이 있었습니다. 나와 같이 수몰지에서 낡은 집을 뜯어다 지은, 정말 멋진 집을 만났습니다. 보성의 어느 선생님 집입니다. 그이는 직접 와서 집을 같이 뜯고 나에게 상세한 조언을 주었습니다. 고흥, 보성, 광주, 장흥의 벗들이 와서 집을 뜯었으니 어느새 집을 반 지은 셈입니다.

이 글을 쓰다 광주에 있는 아내에게 전화를 합니다. 여기는 비인지 눈인지 모를 진눈깨비가 내린다 얘기하며 그곳은 어떤지 물어봅니다. 모른다네요. 아파트 창문을 열어보기 전에는 모르지요. 시골의 집과 도시의 집(아파트가 아니더라도 창문을 여러 겹 두른 채 외부와 최대한 차단한 집이지요)의 결정적인 차이라 생각합니다. 안과 밖의 경계를 넘나들면서도 안의 내밀한 비밀을 보장하고 밖의 활달한 교감을 개방하는 공간의 배치를 가지는 것이 내가 생각하는 집다운 집입니다.

자원 재활용하는 생태적 순환의 자립경제
'오래된 미래'에 대한 낭만적 동경이지요


아내의 집을 따로 지을 생각입니다. 서로의 자유로운 삶과 사유가 보장되는 어떤 거리(물리적일 뿐 아니라 문화적인)가 필요한 것이지요. '오래된 미래'의 현대적 변용의 재배치입니다. 올 봄까지 지을 집에서 터득할 기술과 예술의 능력으로 너무나 간결하고 소담한 집을 지을 생각입니다. 돌과 흙, 나무로 지은 열 평 이내의 토담집, 2~3년을 거쳐서 천천히 지을 집, 돈이 아니라 내 육체의 능력의 확장으로 지을 집.

그런데 가까운 사람들마저 이해하지 못하는, 가끔은 나도 헛갈리는 '내가 짓는 집'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한가지 분명한 것은 집장사가 지은 획일적인 집이 아니라 내가 직접 설계하고 짓는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오해 없기를. 난 구들과 아궁이, 흙집이 유일한 대안이라고 말하고 있지 않으며 차라리 우리들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의 다양한 창조적 재배치를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을. 그러니 벗들이여. 나의 무모한 집짓기에 대하여 혹시 비웃거나 과대포장하지 말기를. 다만 집이 완성되면 소리 없이 한번 다녀가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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