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눈 오는날 찾은 고전음악감상실 '베토벤'
첫눈 오는날 찾은 고전음악감상실 '베토벤'
  • 시민의소리
  • 승인 2001.12.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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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눈이 왔다. 오전 내 한 두 방울 겨울비가 내리는가 싶더니 이내 싸락눈으로 변하고 저녁무렵 한 움큼 잡힐 듯 함박눈이 됐다. 첫눈이 오면 없는 약속도 일부러 만들어서 그럴 듯한 추억을 간직해야 할 것 같다.

베토벤 고전음악감상실은 이런 조그마한 추억들이 살아 숨쉬는 공간이다. 말없이 흐르는 시간과 함께 변해 가는 사람들, 그러나 이곳엔 오랜 친구를 반기듯 변함없는 따뜻한 미소로 손님을 맞이하는 두 여인이 있다. 그래서 첫눈이 온 날 많은 사람들이 이곳으로 발길을 옮겼나 보다.

# 베토벤과 결혼한 두 여인의 이야기.

한달 전 들렸을 때와 주인이 달랐다. 알고 보니 이정옥씨와 노영숙씨는 14년 동업인이었다. 지난 82년 김종성씨가 이곳을 운영하기 시작하면서부터 단골 손님이었다는 이씨와 노씨는 지난 87년 이곳의 두 번째 주인이 됐다.
이들은 전 주인이 마련해 놓은 의자나 테이블 하나 바꾸지 않은 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나무로 만든 바닥, 광주 도심이 한눈에 들어오는 넓은 창, 전 주인이 아끼던 그림까지 20년 전과 똑같다. "아저씨가 만들어놓은 베토벤의 모습이 너무 좋아서 인수했는데 왜 바꿔요"라고 말하는 이씨에게 이곳은 오래된 벗과도 같은 존재다.

이곳이 너무 좋아서 "사람 대신 베토벤과 결혼했다"는 이씨와 노씨. 이들은 손님의 많고 적음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다. "이곳에 우리의 생활 수준을 맞추기 때문에 운영 걱정은 전혀 없어요". 마치 사랑에 푹 빠져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고서도 아깝기는커녕 행복에 젖어있는 여인 같다.

두 여인은 이곳에 젊은 청춘을 맡긴 대신 세월과 함께 영근 미소를 간직하고 있다. 그래서 언제 이곳을 다른 사람에게 인수할 것이라는 우문에 이들은 "내 몸을 움직일 수 있는 한 계속해야죠"라고 현답을 한다.

# 베토벤의 음악 이야기

"오늘은 눈도 오는데 무거운 음악보다 가벼운 음악이 좋을 듯 싶군요" 한 손님의 부탁에 이씨는 붉은 벽돌로 쌓아올린 DJ박스에서 다른 음반을 꺼낸다.
이곳엔 3천여장에 이르는 다양한 음반이 있다. 세계 각국의 고전음악들, 자연친화적인 뉴에이즈 음악, 그리고 가끔 손님들이 직접 들고 오는 음반들로 가득하다.

고전음악감상실이 다른 카페와 다른 점은 감상실이 따로 있다는 것이다. "힘든 일이 있어도 선율에 마음을 실으면 다 잊어버릴 수 있다"는 이씨는 "음악은 때와 장소에 상관없이 귀만 열면 언제든 들을 수 있는 매력이 있다"고 설명한다.

이같은 베토벤의 매력으로 인해 매달 둘째주, 넷째주엔 이곳에서 '고전음악감상동우회 모임'도 열린다. 80년대 다른 음악감상실에서부터 시작된 이 모임은 젊은층부터 노년층까지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 모두에게 열려있다. 이들이 모여 음악에 대해 이야기하고, 사람에 대해 이야기하다 보면 문 닫을 시간이 훌쩍 넘어버리기도 한다.

이곳은 한 때 여고생들의 학창시절 추억이 깃든 곳이기도 하다. 경신여고, 동신여고 음악교사들이 이곳에서 음악을 듣고 감상문을 써오라는 주문을 하기도 했었다고. 이들처럼 음악에 대해 물어올 때면 이씨는 "가장 쉽게, 빠르게, 효과적으로 마음을 정화시켜줄 수 있는 것"임을 강조하며 자신의 체험 이야기를 들려주곤 한단다.

# 그래서 사람들은 베토벤을 찾는다.

두 여인과 베토벤의 음악이 함께 어우러진 이곳은 사람을 끌어들이는 마력을 갖고 있다. "손님들 중 가장 연세가 많으신 분은 88세 되신 할아버지예요. 정치학 석사과정을 마치고 재야 단체에서 일하다가 지금은 가끔 이곳에 들러서 조용히 쉬시다가 가시곤 해요". 이처럼 오랜 친분마저 느껴지는 두 여주인과 손님들 사이에선 메뉴 주문보다 안부 인사가 먼저일 때가 더 많다.

그런가하면 사람의 인생을 바꾸는 묘한 힘도 있다. 음악을 듣기 위해 이곳을 찾다가 나중엔 서로 쪽지가 오가고 결국 결혼까지 이어진 사람들도 있으니 말이다.

베토벤은 광주 뿐만 아니라 외지 사람들의 발목도 붙잡는다. 이해인 수녀나 법정스님, 류시화 시인도 광주를 찾으면 빼놓지 않고 찾는 곳이 바로 이곳이다. 베토벤은 이씨의 말처럼 다리 아픈 나그네들이 쉬어가는 쉼터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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