잎이 진다 한들 사람들아 서러워 마라
잎이 진다 한들 사람들아 서러워 마라
  • 시민의소리
  • 승인 2001.11.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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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장의 나뭇잎을 달고 있는 가을 나무는 눈부시게 빛나는 깃대이다. 스스로 옮겨가지 못 한 채 거기 선 나무에 한 장의 잎새로 나풀거리는 모습은 수복한 정부청사에 걸린 태극기처럼 비장하다.

그래서 가을이 가고 있는 산천은 더욱 쓸쓸하고 곤궁하다. 누가 이런 조화를 만들었는지 알지 못하지만 나무들은 그런 자신의 운명에 대해 별다른 저항 없이 묵묵히 따르고 있고 우린 습관처럼 그들을 바라본다.

그리고 다 늙어버려 기운 쓸 여유 없는 백발 성성한 가을 곁으로 따라 가며 마음이 붉어지고 가을이 감을 느끼고 세월이 저무는 것을 함께 느낀다.
하지만 사람들아! 잎이 진다 한들 서러워 마라. 여기 420년전에 세상을 떠났어도 그 삶이 다시 생생한 나뭇잎으로 되살아 오는 청순한 선비의 삶이 있으니 말이다.

담양 봉산면 제월리 면앙정.
그곳은 조선시대 한 선비의 꿈으로 만들어졌다. 그의 이름은 송순이며, 그가 지은 집 때문에 이름 앞에 면앙정이란 호가 더불어 있다.

맨몸으로 뒹굴어도
먼지 한 점 묻지 않을
낙엽들의 향연…


면앙 : 하늘을 우러르고 땅을 내려본다는 말이다. 상반된 개념의 우러름과 내려봄이란 그 말속에는 대꼬챙이 같은 선비의 본성이 들어 있다. 인간으로서 한 점 부끄럼 없이 살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으니 말이다.

마음이 명징했던 그는 이름의 무게만큼이나 세상에 많은 시와 글을 남기고 그림자를 거두었다.
굳이 들춰보자면 90살을 산 그가 남긴 글은 한문시가 560여수와 국문시가 20여수, 그리고 면앙정가이다. 송강 정철, 백호 임제, 제봉 고경명의 스승이었던 그는 호남가단의 할아버지로서 위상을 차지하고 있다.

세상 사람들이 흔히 읊어대는 그의 시는 참으로 단순하다.
"십년을 경영하여 초가삼간 지어내니/ 달 한 칸 나 한 칸에 청풍 한 칸 맡겨 두고/ 강산은 들이데 없으니 둘러두고 보리라."

십년 동안 벼르고 벼른 끝에 고향의 언덕 위에 초가 세 칸을 지어두고 자연과 더불어 소박하게 살겠노라는 무욕의 마음이 담긴 것을 다들 좋아한다.
하지만 그의 시가 애절양을 썼던 다산보다 훨씬 앞선 시대 날 선 현실의 눈으로 곤궁했던 백성들의 삶을 기록하면서 선정을 다짐했다는 것을 아는 이들은 드물다.

"아이가 우는 것은 그래도 참겠지만 늙으신 어버이를 어찌하리오/ 싸립문을 들락달락 해 보지만 아득하여 갈 바가 전혀 없구나/ 관리는 어떤 사람이길래 공세를 독촉하고 사채마저 내라고 하는지/중략/ 관리도 어찌할 수가 없어서 성내어 소리지르며 자식들을 묶어간다/ 관장도 불쌍히 여기지 않고 형틀을 그 목에 채우고 매를 쳐서 팔 다리를 아프게 한다/ 날이 저물자 서로 붙잡고 함께 울면서 울타리를 돈다."

농가의 원망이라는 시의 내용이다.
이런 현실에 대한 정확한 인식은 그가 27살에 시작해 77살로 향리에 내려 온 벼슬길에서 항상 원만하고 도량이 넓은 가운데 선정을 베풀 수 있는 동력이 되었다.

지금 그가 떠난 면앙정에는 다시 그의 모습이 성하게 차 오르는 순간들이 머물고 있다.
정자의 맞은편에는 당대에 심었다고 전하는 거대한 참나무와 그들의 아들이나 손주 될 법한 수많은 나무들이 가을의 끝자락에 양탄자가 되어 뜨락에 사뿐히 머물고 있다.

왜 하필 면앙은 참나무를 심었을까

급경사의 계단을 타고 오르면 만나게 되는 굴참나무에서부터 뿜어져 내려온 나뭇잎들이 정자 마당에 서면 어머니의 품처럼 편안하게 다가온다.
맨 몸으로 정자를 뒹굴어도 먼지 한 점 몸에 닿지 않을만한 낙엽들의 향연이 거기 있다. 부디 상념의 시간을 가지면서 거닐어 주길 바란다.

왜 하필 면앙은 참나무를 심었을 것인가? 혹시 봄 가뭄이 심해 흉년이 들면 이 상수리 열매라도 구해서 묵이라도 쑤어 먹으라는 것 아니었을까.
밟고 있는 낙엽은 면앙이 항상 살아있을 것이라 여기는 마음처럼 나무로 다시 오를 것이다. 잎이 지는 것은 또 다시 태어나기 위함 아니겠는가? 무엇이 그리 서러운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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