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모적인 문화를 위하여
소모적인 문화를 위하여
  • 시민의소리
  • 승인 2001.11.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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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호 문화' 폐간에 즈음하여>


가령 원시시대의 어느 시점으로 돌아가 문화의 발생 순간을 더듬어 본다고 하자.

내 앞에 막 잡은 맘모스 한 마리가 놓여 있다. 여느 짐승들의 식사와 마찬가지로, 부위의 구별 없이, 그리고 아무런 조리의 절차 없이 그 살을 먹어치운다면 그건 문화가 아니다. 어느 순간 우연히 불에 익힌 고기가 더 맛있다는 사실, 우연히 바닷물의 증발로 얻은 소금을 곁들이면 더더욱 맛이 나아진다는 사실을 터득하는 순간, 문화가 발생한다.

부위별 구분이 생기고, 또한 복잡한 조리법이 발달하고, 먹는 데 사용되는 기구들이 고안되며, 거기에 절차와 관습이 더해지면 그를 일러 음식문화라 한다. 말하자면 필요를 넘어서는 잉여적인 소비 행위가 문화를 탄생시키는 것인데, 생리적 필요에 따른 영양섭취만이 목적이라면 굳이 복잡한 조리법과 기구, 절차 따위는 필요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식사를 마치고 나니, 질겨서 먹지 못한 가죽이 남았다. 말려서 몸에 두른다. 그러다 보니 아무래도 칼질을 좀 해서 몸에 맞도록 모양새를 바꾸는 게 더 편리할 듯하다. 이리 저리 자르고 기워 소매를 만들고, 꼬리 가죽으로는 허리띠를 한다. 물론 여기까지는 문화라 하기 힘들다. 아직 필요를 넘어서는 잉여적 소비 행위가 더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느날 우연히, 정말 우연히 옆 부락의 가와이치쿠타파츄(이름이야 아무래도 좋다) 추장이 익룡의 깃털 하나(익룡에게 깃털이 있었나?)를 자기도 모르는 채로 머리에 달고 나타난다. 보기에 싫지 않다. 너나 나나 머리에 깃털을 꽂는 유행이 만들어지고, 그로부터 소위 의복 문화가 발생한다. 머리에 꽂는 깃털 하나는 추위를 막을 '필요'를 넘어서 있기 때문이다.

문화란 아무래도 그 태생부터 '소모적'이라는 말을 하려는 참이다. 문화란 필요적 소비를 제외한 잉여적 소비 행위에서 시작한다. 아무런 대가나 재소득에 대한 기대 없이, 내가 가진 자산과 시간의 일부를 멋과 아름다움과 휴식을 위해 기꺼이 탕진할 때만 진정한 문화는 탄생한다. 다소 도식화를 무릅쓰자면 <습득된 생산물 ― 필요에 따른 소비 = 문화>이다.

그렇다면, 자명한 사실이지만 영화 <조폭마누라>는 문화가 아니다. 관객이야 기꺼이 자산과 시간을 내놓았다지만, 문화 자본의 입장에서 보자면 그것은 그야말로 거대한 이윤의 '생산'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재종의 시는 문화다. 읽는 이도, 쓰는 이도, 그리고 시들을 묶어 출판한 출판사 측도 아무런 대가 없이 자산과 시간을 소모했기 때문이다. 그 소모로 하여 얻은 것이라곤 고작(정말 고작일까?) '영혼이 정화되는 듯한 느낌', '자연과 말이 하나가 되는 장관을 목격한 듯한 느낌', '치자꽃 한 송이에서 우주를 본 듯한 충만감' 같은 것들이다.

결단코 관에서 문화를 사고하는 일체의 방식은 '반문화적'이다. 감히 문화라는 말 뒤에 '산업'이라는 수사를 붙임으로써, 문화를 소모가 아닌, 생산의 영역으로 만들고야 말겠다는 악의가 뒷 배경이 되고 있는 한 그들이 말하는 모든 문화는 '반문화'다. 같은 이유로 지역축제는 문화축제가 아니며, 해리포터는 문화 영웅이 결코 아니고, 패션쇼도 4만원 짜리 스테이크도 문화가 아니다.

그러나 <금호 문화>는 문화였다. 그것이 아무런 대가나 재생산을 염두에 두지 않고 순수하게 자본의 사회환원 차원에서 만들어진 '소모적인' 매체였기 때문이다. 그러니 우리는 또 한 번 진짜 문화 하나를 잃고, '생산'과 '이윤'의 악무한 속으로 문화를 한 발쯤 떠밀어 버린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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