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불 7열사' 기념조형물
'들불 7열사' 기념조형물
  • 시민의소리
  • 승인 2001.11.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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엊그제 어느 신문에 소개된 한 일본인의 이야기가 기억에 남는다. 전쟁고아로 자라 처절하고 지독한 밑바닥 삶을 살아오며 문맹 퇴치를 위한 '야간중학' 운동을 맹렬히 펼치고 있는 다카노 마사오라는 사람의 자서전을 소개하는 기사였다.

신문을 놓으며 그 사람의 책 제목처럼 [무기가 되는 글자와 말]을 가르치던 젊은 날의 야학시절에 관한 내 낡은 추억이 떠올려졌다. 무엇엔가 '바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던 억압된 존재의 실루엣은 어느 야학의 흐린 전등 아래에 익명으로 남아 흔들거리고 있었다.

이제는 과거형으로 이야기해야 하겠지만, 야학이 검정고시를 대비하는 검시야학이든, 국어 산수 등을 가르치던 생활야학이든, 인간다운 삶의 길을 가르치던 노동야학이든 배우는 자와 가르치는 자의 순수와 열정만큼은 하등의 차이가 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야학을 찾는 이들 모두는 가난이든 의도적 일탈이든 제도로부터 소외된 이들이 틀림없었고, 그들과 고된 밤을 함께 하던 젊은 강학들의 순결한 정신은 투명한 공기처럼 맑았다고 믿는다.

내가 80년대 중반 어느 생활야학의 교사로 활동하던 시기에 '들불야학'은 이미 전설이 되어 있었다. 다들 인정하다시피 들불야학은 오월 광주를 가능케 한 역동적 동인의 하나였다. 그 곳에서 배우는 학생이나 가르치는 교사나 서로를 비추는 거울이 되어 불모의 세상을 이기고 자기전환을 감행해 나가도록 했다고 역사는 증언한다.

언젠가 풍문에 들불야학 출신들을 위한 기념사업 이야기를 들은 것 같다. 들불 출신으로 노동운동 민주화운동 문화운동을 하며 요절한 사람이 일곱 분이나 된다고 하니, 대체 무슨 업장이 쌓여 그들의 생명을 짓눌렀는지 안타까울 뿐이다. 그 분들을 위한 '넋풀이'를 남은 이들이 해 준다니 만시지탄이라 해야 할까 모르겠다.

일곱 분의 '열사'를 기리는 기념사업의 골자는 그들을 주인공으로 하는 조형물을 세운다는 것이었다. 죽은 자의 업적을 기리는 일은 참으로 흐뭇하지만, 동시에 더없이 신중해야 한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예로부터 비석이나 공적비는 세워 빛을 보는 것보다 세우지 않아 후세에 오래 남는 경우가 많았다. 예를 들어 장성군 황룡면에 있는 박수량의 '白碑'에 얽힌 이야기는 그 점에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알려진 바로 광주지역에 이미 21명의 시인을 기리는 비석이 세워져 있고 이런저런 기념조형물을 더하면 그 수는 실로 엄청나서 심하게 말해 '비석의 도시'라 해도 무방할 정도다. 들불야학 출신 인사들의 공적을 기리는 사업이 행여 살아남은 자들의 부담 때문에 조형물 건립이라는 관성적인 방식으로 무리하는 것은 아닌지 궁금해졌다. 더군다나 죽은 자를 기리면서 정작 자신들의 명예가 도드라지게 되는 예기치 않은 경우가 벌어지지는 않을지 염려스럽다.

들불을 거쳐 간 이들 중 죽어 '이름' 석자를 남긴 이가 어찌 그 일곱 사람뿐이겠는가. 다만 들불야학을 찾았던 이들의 정신을 기리고, 청춘을 바쳐 노동자들과 함께 했던 삶을 더듬고, 야학을 통해 세상을 배워갔던 아름다운 인간들의 의지를 후세에 전하고자 한다면, 공허한 조형물로 그 영예로운 이름들을 두고두고 옥죄기보다는 들불야학을 오늘에 되살리는 실천적 대안의 공간에 관심을 두는 것이 어떨까 싶다.

'야학'이라는 말 자체를 불온시하던 음습한 시절을 건너 이제 야간학교를 설립하며 운영하던 정신은 제도교육의 완고한 틈을 비집고 좀 더 다른 차원으로 살아나고 있다. 이를테면, 전국에 산재한 대안학교가 바로 그것일 터이다.

그렇지만 이런저런 야학을 요청했던 권태로운 시대처럼, 이를테면 간디학교와 같은 '대안' 교육장이 많이 서는 뒤틀린 교육현실이 곤혹스러운 것도 사실이다. 들불을 빛낸 열사들이 살아남아 있다면, 바로 그 지점으로 맹렬하게 육박해 들어갔을 것이 틀림없다.

세월은 흘러갔어도 들불야학의 존재 이유는 그 모습과 골격을 달리 할지라도 변함없이 남아 있다고 믿는다. 이름하여 '들불7열사' 추앙은 그들 자신의 형상 재현이 아니라, 그들이 숭고하게 소진시킨 삶과 정신에 대한 의미있는 현재화가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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