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 아래 젖은 구름 ... 징검다리 봉우리
발 아래 젖은 구름 ... 징검다리 봉우리
  • 시민의소리
  • 승인 2001.11.01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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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라는 말을 자꾸 되뇌이다 보면 오곡의 풍성함과 솔잎의 향기가 바람을 타고 낙엽과 함께 한 웅큼 내게로 다가올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좀 더 가까이 이런 계절을 느끼고 싶어 마음 졸이며 주말을 기다리는 사람이 유독 많은 계절이다. 길 떠남이 직업이 된 필자도 이런 가을은 벌써 여러곳을 점찍어 두고 즐거운 선택을 한다. 하지만 이렇듯이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고민이 생겨났다.

비 갠후 저 아래 구름 사이로
얼굴 내민 주변 산들
징검다리 되어


이 글을 보고 또 사람들이 자꾸 찾아들어 망가지면 또 어쩌나 하는 그런 걱정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연의 것은 자연 그대로 두고자 노력하는데 쓸데없이 자연을 탐하는 사람들은 그것을 제집 안방으로 혹은 마당으로 자꾸 옮겨 갈려고 안달을 한다.

어디 이 산하가 농투사니들에 의해 파괴되었다는 얘기 들은적 있었는가? 자본과 권력에 집착하는 모리배 몇몇에게 신음하고 있는 것이지 라고 자위 해보며 또 한 길을 얘기한다.

나는 지난 주말 아주 오랜만에 배낭을 메고 비를 맞으며 지리산의 한 길을 택했다. 그곳은 사람의 발길이 뜸한 곳이어서 비가 오지 않았다면 내 배낭에 반드시 고무신 한 컬레가 자리잡고 있어야 했다.

땅을 내딛을 때 느껴지는 대지의 순결함이 콘크리트에 길들여진 발바닥을 타고 다리를 지나 심장을 거쳐 머리까지 전달될 때, 나는 야릇한 쾌감의 무젖은 세계에 접어들 수 있는 순간을 그 길에서 만나기 때문이다.
비는 쉴 새 없이 쏟아졌지만 후배와 나는 두시간 반동안 헉헉거리며, 남겨두고 온 세상에 대한 조소로 체력을 북돋아 정해진 코스에 올랐다.

거의 다 닿을 무렵에는 산토끼 한 마리가 내 헤드렌턴의 빛에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며 조응을 했다. 십여년 전 군대의 야간 매복작전이 있었던 비 오는 날 참나무 아래 웅크리고 꼼짝하지 않던 토끼를 잡았던 기억이 등반하면서 떠올랐는데 이렇게 또 영감이 적중하구나 라는 생각을 하며 녀석이 뛰어가는 사위를 한참을 바라보았다.

목적지 산장에 여장을 풀고 샘에서 비를 훔쳐내고 마른 옷으로 갈아입고 산정의 소리를 모아 보았다.
구상나무를 흔드는 바람소리, 양철 지붕으로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 파열음을 내고 고속질주하는 어떤 성급한 바람소리, 비를 피하려 재잘대며 처마 밑으로 다가오는 딱새의 울음소리, 그런 소리에 자꾸만 귀를 모으다 잠이 들었다.

아주 오랜만에 꿈을 꾸었다. 영화를 보고 있는 내 모습이었다. 영화의 주인공은 버질과 에이미였다.
쉼이 필요한 역량있는 건축설계사인 뉴욕커 에이미란 여인이 주변의 강권에 떠밀려 온천 휴양지의 한 호텔에 투숙하면서 만난 버질이란 눈이 보이지 않는 안마사와의 사랑을 그린 영화였다.

한 살 때부터 세상이 보이지 않았던 버질이지만, 보이는 것이 많아 이것저것 쓸데없는 탐욕에 집착하는 세간 사람과 달리 지붕 위로 떨어지는 빗소리로 비가 내리는 양이나 시간을 예측하고, 벽을 흘러내리는 소리로 공간의 부피를 가늠하고, 몸으로 느끼는 감촉과 냄새 등으로 주변의 모습을 재구성하는 그 만의 우주를 가지고 있는 멋진 남자와의 사랑 얘기였다.

얼마 전부터 컴퓨터에만 앉으면 다가오는 어깨의 통증과 오른쪽 머리의 지끈거림이 산정에서 풀어지면서 머릿 속에 남아있던 버질의 감성에 대한 부러움이 꿈을 불러들인 모양이다.

잠에서 깨어보니
구름은 내 머리 위에서 놀고
산골짜기엔 불타는 산하만이…


꿈에서 깨어 산장 밖을 나서보니 비는 그치고 주변의 산들은 구름에 얼굴만 내밀고 마치 징검다리가 되어 있었다.
종일 비가 내리리라고 생각했는데 예기치 않은 아침이 시작된 것이다. 구례 시가지를 휘도는 구름이 섬진강을 타고 백운산을 덮고, 천왕봉 쪽에서 오는 구름이 피아골 쪽에서 서로 만나 엉켜 붙는 모습을 바라보며 어느새 나는 또 길섶에서 잠에 취했다.

문득 세찬 바람이 싸리나무를 흔들어 내 얼굴을 스칠 때 잠에서 깨어보니 구름은 내 머리 위에 놀고 있고 산골짜기에는 불타는 산하만이 남아있었다.
가을의 사랑이 이 골짜기에 가득했다. 내려가자는 후배의 말을 들으니 잊었던 어깨의 통증이 시작됐다. 나는 세상을 붙잡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닌데 왜 세상이 내 어깨에 올라와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지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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