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霧津紀行(신무진기행)
新霧津紀行(신무진기행)
  • 시민의소리
  • 승인 2001.10.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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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학기부터 매주 월요일마다 순천의 모대학에 출강 중이다. 벌써 갱신 기간을 지나버린 운전면허증이 무색하게도 아직 운전을 못하는 나인지라, 1교시 수업 시간에 맞추려면 가뜩이나 많은 아침잠을 떨치지도 못한 채 아주 이른 시간부터 서둘러 고속버스를 잡아타지 않으면 안된다. 첨엔 체질에 맞지 않는 이른 아침의 부산이 꽤나 부담스럽고 불편한 감도 없지 않았지만, 이즈음엔 제법 일주일에 한 번씩의 버스 여행을 즐기게 되었다.

버스에 올라 월요일자 한겨레신문의 문학란을 대강 훑어보는데 약 10여분, 그러고 나면 곧장 잠이 몰려온다. 망설임 없이 잔다. 달콤한 조각잠 후에 눈을 뜨면, 대개 버스는 승주나 주암 어디쯤을 지나고 있게 마련이다. 특히 버스가 주암터널을 막 빠져 나올 때쯤 눈을 뜰 때가 가장 많다. 터널이 만드는 빛의 변화가 잠을 깨우는 탓이리라. 운좋은 날은 바로 그쯤에서 그 유명한 무진(霧津)의 안개를 만나게 된다. 안개는 대강 이런 모습이다.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그것은 안개다.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서 밖으로 나오면, 밤사이에 진주해온 적군들처럼 안개가 무진을 삥둘러 싸고 있는 것이었다. 무진을 둘러싸고 있던 산들도 안개에 의하여 보이지 않는 먼곳으로 유배당해버리고 없었다. 안개는 마치 이승에 한(恨)이 있어서 매일 밤 찾아오는 여귀(女鬼)가 뿜어내놓은 입김과 같았다.

해가 떠오르고, 바람이 바다 쪽에서 방향을 바꾸어 불어오기 전에는 사람들의 힘으로써는 그것을 헤쳐버릴 수가 없었다. 손으로 잡을 수 없으면서도 그것은 뚜렷이 존재했고 사람들을 둘러쌌고 먼곳에 있는 것으로부터 사람들을 떼어놓았다. 안개, 무진의 안개, 무진의 아침에 사람들이 만나는 안개, 사람들로 하여금 해를, 바람을 간절히 부르게 하는 무진의 안개……

한국 문학사상 최고의 단편으로 친다는 김승옥의 [무진기행], 그 중에서도 가장 인상적이라는 도입부의 안개 묘사 부분이다. 논란이 아예 없을 것 같지는 않지만, 실제로 안개에 의해 유배당해 버린 채 수묵화에서처럼 뿌옇게 번진 산들의 모습이며, 달리는 버스 앞 유리창에 하얗게 덩어리져 부딪혀 오는 여귀의 입깁과도 같은 안개의 형상을 보고 있노라면, 확실히 무진의 실제 지명이 순천임을 믿지 않을 수 없게 된다(실제로 김승옥이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이 바로 순천이다).

심한 경우, 내가 마치 소설의 주인공이라도 된 양, 저 안개를 벗어나 무진에 들면 거기 '조'씨 성을 가진 퇴폐적인 내 친구 하나와 그 옆에 앉아 다소곳이 술잔을 기울이며 밤새 처지는 뽕짝을 구슬프게 불러대는 여선생의 모습이라도 기다리고 있지 않을까 상상해보기까지 한다. 그러고 보면 안개에 젖는 내 월요일 아침은 다소 감상적인 데가 있는 셈이다.

그런 어느 날이었을 게다. 버스에서 내려 한달음에 강의실까지 뛰듯 달려가서도 그 감상에서 벗어나질 못한 채로 아이들에게 물었던 적이 있다.

(수업 전에 분위기도 잡을 겸 안개 얘기를 꺼낼 요량으로) "[무진기행]의 무대가 어딘 줄 아세요?" ……(잠잠)
"(이런!)……그럼 무진기행 작가가 누군지는……" ……(잠잠).
"(이런! 이런!)……니들 무진기행이 뭔지는 아니?" ……(잠잠).
……
"출석 부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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