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타깝다! 안젤리나 졸리
안타깝다! 안젤리나 졸리
  • 시민의소리
  • 승인 2001.10.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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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주의 영화이야기-'오리지날 씬'>

섹스 이야기 속에 숨겨진 왜곡과 음습함에는, 남자의 원초적 폭압과 여자의 원초적 내숭이, 사회적 통념이나 윤리적 규율로 만들어진 고정관념 속에서 비비꼬여 숨어있다. 이 글마당은 그렇게 형성된 고정관념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그래서 이 글이 그리 편치 않다.

[바디 히트]의 캐서린 터너와 [포스트맨]의 제시카 랭이 보여준 농염한 요부의 섹시함은 나의 젊음을 후끈하게 달구었고, 젊음이 곰삭아 30대가 저물 무렵 나는 또 하나의 요부를 만났다.

샤론 스톤! [원초적 본능]은 악녀의 뇌쇄적인 쎅시함에 섬짓한 잔혹함을 섞어 긴박감 넘치게 만든 영화이다. 뾰쪽히 날선 얼음송곳으로 내리 찌르는 잔혹함에 몸서리치도록 모골이 송연하였지만, 매서운 눈초리가 날아 박히고 날카로운 손톱사이로 얽어드는 매혹이 매저키즘의 수렁에 허우적거리게 하였다. 밑바닥에 깔려드는 스산한 배경음악이 더욱 그러하였다.

샤론 스톤의 손톱자욱이 아직 후끈거리는데, 안젤리나 졸리가 나타났다. 탐스럽게 빨아들이는 그녀의 도톰하고 쫄깃한 입술이 길죽한 얼굴과 둥근 이마에 타락한 눈빛과 어우러져 이국적인 방탕을 부른다.

[오리지날 씬]은 원초적 죄악을 부르는 그녀의 섹시한 이미지만 돋보이는 영화이다. 이 영화를 만든 감독의 역량이 참 야릇이다. 스토리에 미스터리 추리극의 긴장감이 크게 흩어지지 않음을 보아서는 그리 역량이 없는 감독은 아닌 것 같은데, 첫머리의 이야기 설정이 너무 어처구니없이 허무맹랑하고, 끄트머리에서 너무 유치한 해피엔딩으로 영화의 그나마 남은 긴장감과 비장미를 한 입에 말아먹어 버렸다.

의상이나 소품처리가 섬세하고 혁명이전의 쿠바 분위기를 잘 살려내었으며, 안젤리나 졸리라는 타락한 요부의 이미지를 스페인 풍의 화려함 안에 잘 담아냈음에도 불구하고, 실감나게 살려내야 할 안젤리나 졸리의 타락한 섹시함을 다양한 앵글과 터치로 담아내지 못함이 못내 안타까웠다.

[원초적 본능]에서 샤론 스톤처럼 강렬하게 인상지울 수도 있었던 또 하나의 악녀가 그 요사스러움을 한껏 드러내지 못한 이 영화가 아쉽기 그지없다. !

안젤리나 졸리가 검푸른 바다에 일렁이는 파도의 거품 속에서 ‘검은 요부의 탄생’으로 다시 부활하기를 기다리겠다.

나는 때때로 내 자신이 두려울 때가 있다. 그리고 아주 가끔, 그 잔혹한 새디즘과 매저키즘이 살갗을 스쳐 지나가노라면, 사시나무 떨 듯 몸서리친다. 그래서 이 악마적인 고통을 이야기하지 않는 ‘경건한 건전함’을 믿지 않는다. 이 악마적 고통을 직접 맞부딪히지 않고, 무턱댄 저주로 엄히 꾸짖는 성인의 말씀에, 위선과 허세를 느낀다.

그래서 나는, ‘아름다운 서정’이나 읊어대는 ‘시인 묵객’에게서 철부지 환상이나 위선적 자위행위를 보며, ‘고결한 이상향’을 찬양하는 ‘혁명가나 종교인’에게서 자기를 폼나게 보이고 싶은 위선적 이기심이나 허영으로 가득찬 옹고집을 본다.

돈과 섹스와 권력의 질긴 유혹과 엄청난 위력을 맨 몸으로 부딪히는 고통에서 서글피 울어보지 않은 사람 그리고 그 삶의 미로에서 헤매임을 고백하지 않는 사람, 그래서 그저 아름다움 고결함 기쁨 행복 희망 따위만을 말하는 사람들. 책을 열 수레를 읽었다해도, 예수 부처 공자 아니 그 할애비를 섬긴다 해도, 나는 그들의 말과 글을 결코 믿지 않는다.

경건한 건전함으로 고아한 품격만을 내세우는 그 위선과 허영을 고백하지 않는 ‘사이비 지성과 위선적 믿음’을, 우리는 널리 이야기해야 한다. 그래야 국가와 민족이라는 이름으로 종교와 이상향이라는 이름으로 문화와 예술과 지성이라는 이름으로, 암암리에 음습하게 자행되고 짓누르는 음모와 폭압에서, 우리는 조금이라도 벗어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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